신의 놀이, 인간의 창작

by 신성규

창작이 ‘놀이’가 되는 순간, 천재성은 흐르기 시작한다. 그것은 억지로 쥐어짜낸 결과가 아니라, 자유의 장에서 피어나는 생명력이다. 음악, 미술, 문학은 물론이고, 과학과 수학마저도 본질적으로는 놀이의 산물이다. 우리는 이를 공부라 부르지만, 본디 공부란 ‘궁구하다’는 뜻처럼 경계 없이 탐구하고 뛰노는 정신의 행위였다.


천재들은 언제나 놀았다. 모차르트는 음표와 놀았다. 피카소는 형태와 선을 가지고 장난쳤으며, 괴테는 언어와 사유의 곡예를 즐겼다. 이들에게 창작은 과제가 아닌 해방이었고, 목적이 아닌 흐름이었다. 그들이 뛰어든 세계는 생산이 아닌 유희의 공간이었고, 바로 그 유희 속에서 새로운 개념과 질서가 태어났다.


신은 세계를 창조할 때 놀이하듯 했을까?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인간이 창작을 놀이로 받아들일 때만이 신의 경지에 도전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오만이 아니다. 오히려 창조적 인간이자 ‘놀이하는 인간(Homo Ludens)’으로서의 인간 본성을 인정하는 태도다. 놀이하는 인간은 세계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되, 깊이 탐구한다. 그는 결과에 매달리지 않으며, 과정에 몸을 던진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새로운 언어가 탄생하고, 새로운 질서가 구성된다. 이 놀이는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 그 자체를 바꾸며, 기성의 의미 체계를 해체하고 재구성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자신이 만든 개념과 체계를 통해 ‘신이 만든 세계’를 다시 그려낸다. 창작은 그렇게 신의 흔적을 따라가면서, 동시에 인간의 흔적을 남긴다.


예술도, 과학도, 수학도 모두 놀이다. 위대한 창작은 결코 죽은 의무감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살아 있는 리듬, 미지에 대한 경이, ‘몰입’이라는 놀이에서 솟는다. 그래서 천재는 유년기의 영혼을 끝까지 지닌 자다. 그 영혼을 잃지 않기 위해, 그는 절망도 받아들이고 고통마저 재료로 삼는다.


창작이 놀이가 되는 순간, 인간은 신의 경지에 도달한다. 아니, 신조차 부러워할 만큼 인간은 아름다운 존재가 된다.

keyword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팔로워 143
이전 11화글은 폭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