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단순히 쌀을 얻는 일이 아니다. 땅은 생명의 순환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벼를 거두고 나면 남는 볏짚은 소의 먹이가 되고, 그 소는 다시 똥을 싼다. 그 똥은 땅을 살리는 퇴비가 된다. 이 단순한 흐름 안에 얼마나 정교하고도 아름다운 균형이 숨어 있는가. 인간은 이 순환을 방해하지 않고 조율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땅은 다 같지 않다. 같은 마을, 같은 지역, 바로 옆의 논이라도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다. 아주 약간의 경사, 그 경사 하나로 물 빠짐이 달라지고, 물을 대는 일의 난이도도 바뀐다. 바람이 드는 방향, 주변의 수풀, 햇빛의 각도, 심지어 벌레의 방문 빈도까지도 논마다 다르다. 이 미세한 차이들이 농사의 운명을 바꾼다.
그래서 농부는 기억해야 한다. 이 땅에는 언제 어떤 종자를 심었고, 어떻게 김을 맸고, 어떤 병충해가 돌았는지를. 농사는 기술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땅과 시간에 대한 기억이다. 좋은 농부란 기억을 오래 품고, 기억을 바탕으로 감각을 가다듬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건, 생명을 바라보는 섬세한 눈이다. 땅은 단지 농작물을 키우는 곳이 아니다. 그것은 순환의 장소이며, 배움의 장소이며, 결국 자연을 이해하려는 인간의 겸손한 자세가 스며든 공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