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가 어린 시절 고뇌했을까?
나는 그렇다고 믿는다.
영화라는 형식 속에 사색을 녹여내는 그 정밀함,
그의 대사는 생각의 굴절과 틈을 예민하게 감지하는 자의 것이다.
그는, 감독이기 이전에 철학자다.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한다.
왜 존 레논과 오노 요코는 세기의 커플로 칭송받고,
홍상수와 김민희는 지탄의 커플이 되는가?
레논도 결혼한 몸이었다.
그는 욕망과 예술, 정치적 메시지를 뒤섞으며
기성 질서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 되었고,
그 안에서 오노 요코는 뮤즈를 넘어선 예언자처럼 조명되었다.
하지만 홍상수는?
그는 대중 앞에 무대 위 연설도 하지 않았고,
예술의 이름으로 시대를 구원하겠다는 선언도 하지 않았다.
다만, 한 사람을 택했고,
그 사랑을 지속했고,
그의 영화는 점점 김민희의 얼굴로 가득 채워졌다.
침묵 속에서, 그는 자신의 예술을 변호했다.
대중은 차이를 만든다.
레논은 세계의 반전 운동과 연결되어 있었고,
요코는 동양의 신비로움과 결합된 페미니즘의 모호한 상징이었다.
그들의 사랑은 이데올로기의 틀 안에서 미화되었다.
그러나 홍상수는 너무 한국적이었다.
너무 조용했고, 너무 일상적이었고, 너무 인간적이었다.
그의 사랑은 가정 파괴, 불륜, 탈권위라는 이름으로만 규정되었다.
도덕은 시대가 만든다.
예술은 시대를 초월하려 한다.
그러나 그 경계에서 살아가는 예술가는 언제나 이중의 심판을 받는다.
그럼에도 나는 묻고 싶다.
당신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당신의 생각과 감정이 불순하다고 단정할 수 있는가?
아마도 우리는 불편한 사랑을 감당할 준비가 되지 않은 시대에
불편하게 진실한 사랑을 본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