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울 때, 흔히 감정을 배출한다고 말한다.
슬픔, 분노, 억울함, 심지어 기쁨마저도 눈물이 되어 흐른다.
그러나 눈물은 단순한 정서적 배출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가 균열될 때 나타나는 하나의 형이상학적 반응이다.
울음은, 말이 도달하지 못한 곳에 도달하는 방식이다.
‘배출’은 에너지나 물질이 내부의 압력으로 인해 외부로 밀려나는 일이다.
공장에서는 폐수, 인간은 숨, 그리고 때로는 감정을 배출한다.
하지만 감정의 배출은 단지 정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배출은 존재가 그릇보다 커졌다는 증거이며,
내부의 세계가 더 이상 안에 머물 수 없다는 절규다.
즉, 눈물은 의미의 한계를 밀어내는 행위다.
울음은 언어의 실패로부터 비롯된다.
우리는 때로 아무리 말해도 전해지지 않는 고통을 느낀다.
그때 울음이 터진다.
울음은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존재 전체가 무너져내리는 순간,
그 무너짐의 소리를 몸으로 낸다.
침묵은 깊고 아름답지만,
그 침묵마저 무너질 때,
우리는 운다.
눈물은 감정이 흘러넘치는 게 아니라,
‘나’라는 구조에서 세상이 탈출하는 방식이다.
세상의 무게가 너무 커졌을 때,
나는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고 금이 간다.
그 금에서 흐르는 것이 바로 눈물이다.
따라서 눈물은 개인의 감정이 아니라,
세계와 ‘나’ 사이의 압력차가 만들어낸 균열이다.
이때 눈물은, 말보다 더 정확하게 존재의 상태를 진술한다.
아이들은 자주 운다.
그들은 세상을 감당할 만큼 크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 우리는 참는 법을 배운다.
참음은 위대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때로 존재의 정직함을 억압하는 훈련일 뿐이다.
진실된 존재는 자주 운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계가 너무 무겁다는 걸, 자주 느끼기 때문이다.
울고 나면 우리는 종종 말한다.
“조금 가벼워졌다”고.
그것은 단순한 심리적 안도감이 아니다.
그것은 나라는 존재가 다시 압력을 재조정한 뒤,
새로운 균형을 찾았다는 신호다.
나는 울고, 무너지고, 흘러내린 후에
조금 더 투명한 나로 다시 일어난다.
그러므로 눈물은 약함이 아니라,
존재의 통과의례다.
눈물은,
“나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조용한 선언이다.
눈물은 나로부터 세계가 흘러나오는 길이다.
눈물을 참는 행위는 존재의 억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