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종이를 마주할 때마다 묘한 압도감을 느낀다. 하얗고 텅 빈 그 공간은 마치 나를 시험하는 무언의 시선 같다. 그것은 다른 어떤 예술 매체보다도 정직하고, 잔인하며, 동시에 매혹적이다. 이 감정은 어쩌면 화가가 비어 있는 캔버스를 마주할 때와 비슷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캔버스엔 붓과 물감이 있고, 음악에는 음정과 악기가 존재한다. 글쓰기는 오직 펜 하나, 생각 하나로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하는 예술이다.
바로 그 점에서, 나는 글쓰기에 끌렸다.
펜은 가장 단순한 도구지만, 가장 날카로운 감각을 요구한다. 돈이 한 푼 없어도, 누구나 종이 한 장과 펜 하나로 세상과 싸울 수 있다. 이 정직한 평등성은 글쓰기의 아름다움이다. 예술의 세계에서 보기 드물게, 물질의 격차를 뛰어넘어 정신과 사고의 힘만으로 승부할 수 있는 영역. 나는 그 정면 승부에 매력을 느낀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글쓰기가 결코 ‘공평한 예술’만은 아니라는 사실도 인식한다. 경험의 폭이 글을 좌우한다. 자본이 허락한 여행, 고요, 음악, 미술과 같은 아름다움의 체험은 글의 색채를 풍성하게 만든다. 반대로 고통과 결핍, 생존의 갈망에서 비롯된 문장들은 절박하고 날카롭다. 돈이 필요 없는 예술 같지만, 자본이 만든 세계를 얼마나 접해봤느냐가 결국 문장의 층위를 가른다.
아름다움을 경험한 작가와 고통을 경험한 작가는 서로 다른 빛깔의 문장을 쓴다. 전자는 풍요의 결을 알지만, 후자는 빈틈과 어둠의 언어를 안다. 이 둘은 어떤 날에는 서로를 오해하고, 또 어떤 날에는 절실히 그리워한다.
나는 아직 그 둘 사이 어딘가에 있다. 가난했지만 가난하지 않았고, 아팠지만 생존의 끝을 맛보지는 않았다. 그래서 어쩌면 아직도 빈 종이를 보면 떨린다. 나에게 글은 정복이 아니라, 매번 새롭게 시작하는 사유의 전장이다. 오직 펜 하나로, 세계와 나 자신을 마주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