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외교적 자기모순

by 신성규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계는, 특정한 국가의 입장을 ‘보편적 정의’로 받아들이도록 학습돼 있다.

그 대표가 바로 미국이다.


미국을 향한 미약한 비판조차 “반미주의자”, “친중·친러”, “좌파”, “빨갱이”라는 낙인을 동반한다.

이것은 공론장의 논쟁이 아니라, 종교적 이단 심문에 가깝다.


하지만 미국이 말하는 “정의”는 정말 그들이 말한 그 모습인가?


중동은 석유와 자유라는 명분 아래 파괴되었고,

이라크는 존재하지도 않은 대량살상무기로 폐허가 되었다.

베트남에선 자국 이익을 위한 대리전이 지속되었다.

남미는 친미 정권을 세우기 위한 쿠데타와 암살의 실험장이었다.

가자지구의 파괴는 침묵되고,

오히려 미국은 이스라엘의 폭격을 방관하거나 무기 판매를 확대하고 있다.


미국은 정의를 말하지만, 그 정의는 “내가 곧 정의다”라는 권력의 언어로 작동한다.

이견은 ‘사실’이나 ‘다름’이 아니라 ‘반역’으로 간주된다.

이는 사상의 자유를 억누르는 집단 동일화 압력으로, 파시즘의 전형적인 논리다.


이 세계관은 매우 위태롭다.

그것은 사상의 자유를 억누르는 집단 동일화 압력이며,

나치즘과 파시즘의 핵심 논리와 구조상 다르지 않다.

다른 점은 깃발의 색일 뿐이다.


이 정의란, 정말 미국이 말하는 그 모습인가?

그렇다면 왜 세계는 그들의 손이 닿은 곳마다 상처를 입었는가?

정의를 실천하기 위한 과정이었음을 어느 누가 납득하는가?


그들은 자유와 인권을 외치며, 동시에

다원성과 타자의 권리를 억압한다.


이것은 ‘자유를 위한 전체주의’라는 자기모순이며,

정치적 이익을 위한 감정의 도구화다.


그렇다면 묻자.


왜 한국은 러시아·중국에 대해선 ‘민주주의 수호’의 깃발을 들면서,

미국이 지지하는 이스라엘의 전쟁 범죄에는 침묵하거나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가?


이는 단순한 외교적 실리의 문제가 아니다.

그 이면에는 우리가 어떤 정의 개념에 몰입하고 있는지가 드러난다.


한국은 미국과의 안보동맹 속에서

미국 외교 노선에 대한 비판을 안보 불이익으로 간주하는 구조에 있다.


반면, 러시아·중국은

‘권위주의’ 국가로 분류되며, ‘민주주의 vs 전체주의’라는 프레임 안에서 비판되기 쉬운 대상이 된다.


결과적으로 한국은

미국의 침묵엔 침묵, 미국의 규탄엔 동조하는

선택적 정의, 감정의 불균형 상태에 놓여 있다.


사람들은 말한다.

“한국은 소국이니, 강대국 눈치를 봐야 한다.”


하지만 왜 그 눈치는 미국에만 해당되는가?

중국과 러시아에겐 왜 그렇게 자주적이고 단호한가?


눈치란 원래 모두를 향한 비대칭적 감각이어야 하지 않는가?

편향된 눈치는 외교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의 복종일 뿐이다.


우리가 외치는 “정의”는

모든 상황에 일관되게 적용되는가?

아니면 강자에게 복종하고, 약자에겐 목소리를 높이는

국제 권력 구조에 순응한 감정의 편향인가?


진정한 민주주의는

자기비판을 멈추지 않는 원칙의 실천이다.

정의는 누구의 편이 아니라,

누구도 침묵으로 억압하지 않는 언어의 자유 위에 존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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