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토론 속 최저임금의 지역별 차등화 논의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미국의 사례를 들어, 각 지역의 물가와 산업 여건이 다르니 임금 역시 다르게 책정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겉보기에 이 주장은 합리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이는 제도적 맥락을 무시한 피상적 수입이자, 균형 발전이라는 더 큰 그림을 외면한 제안이다.
무엇보다 먼저, 미국은 연방제 국가다. 각 주는 독자적인 헌법, 세금 정책, 법률을 가진다. 어떤 주는 총기를 허용하고, 어떤 주는 마리화나를 합법화하며, 어떤 주는 최저임금을 자체적으로 크게 높인다. 기름값, 공공요금, 소비세까지도 지역마다 다르다. 다시 말해, 미국은 ‘하나의 국가’라기보다 ‘작은 국가들의 연합체’에 가깝다. 따라서 지역 간 차등화는 그들의 제도적 기반 위에서 자생적으로 작동하는 구조다.
하지만 한국은 다르다. 우리는 중앙집권적 국가다. 세금도 법도 노동정책도 모두 서울 한복판에서 만들어진다. 물가는 다르지만, 제도는 동일하다. 그렇다면 이 구조 안에서 인위적인 최저임금 차등화는 무엇을 남기는가? 바로, 차이만 남기고 보완은 없는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지역 현실의 맥락을 완전히 도외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의 지방은 이미 인구와 일자리 측면에서 고통을 겪고 있다. 청년들은 떠나고, 기업은 수도권에 몰린다. 임금이라는 마지막 유인마저 빼앗긴다면, 도대체 누가 지방에 남겠는가? 더 적은 돈을 벌면서도 열악한 인프라를 감내할 사람은 없다. 차등화는 곧 ‘지방 포기 선언’이나 다름없다.
이러한 우려는 결코 가정이 아니다. 일본은 이미 그 실험을 했다. 47개 도도부현마다 최저임금을 다르게 설정했던 일본은, 대도시와 지방 간 격차를 줄이기는커녕 오히려 심화시켰다. 청년은 도쿄와 오사카로 집중되고, 시코쿠나 동북 지방은 소멸 위험 지역으로 전락했다. 내수 규모나 경제 완충력에서 한국보다 훨씬 큰 일본도 감당하지 못했던 일을, 한국이 감당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단순한 모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한국의 내수 시장은 일본보다 작고, 수도권 집중은 더 심각하다. 이러한 현실을 외면한 채, 임금 차등만을 주장하는 것은 불균형을 제도적으로 고착화하겠다는 선언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