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개랑 살거다!

by 신성규

나는 여자들에게 종종 이런 말을 듣는다.

“넌 금치산자 같아.”

“넌 마약 같은 존재야.”

“슈가 마미가 필요하겠다.”


이 말들은 농담처럼 흘러나오지만, 그 안에는 명확한 구조가 숨어 있다.

나는 매력적일 수는 있지만, 함께 삶을 꾸릴 대상은 아니라는 선언.

결국 그 말들이 뜻하는 바는 이렇다.

“사랑은 가능할지 몰라도, 함께 삶을 설계하는 건 불가능해.”


나는 가난하게 살아도 된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해왔다.

예술을 사랑하고, 말에 깃든 결을 이해하며, 사유를 생활의 호흡처럼 여기는 삶.

그 모든 것이 내게는 부유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삶은 경제적 기준에서 부유하지 않았고, 그 차이는 관계의 문턱에서 언제나 가로막혔다.


문제는 나의 자발적 가난이 아니다.

진짜 문제는, 타인의 불안이 나를 외면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나는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러나, 함께 살아주겠다는 이는 거의 없다.


나는 종종 이런 모순에 직면한다.

문화자본은 넘치도록 인정받지만, 그것이 삶의 조건으로 선택되는 일은 드물다.

예술성과 감수성, 철학과 인간성은 인정받되,

그 모든 것을 갖춘 나는 ‘결혼 상대’로는 회피된다.


사랑은 존재의 고백이지만, 현실은 조건의 거래다.

‘있는 그대로의 나’는 좋아하되,

‘현실의 나’는 거부당하는 상황이 반복된다.


여기서 나는 근본적인 질문을 마주한다.

“과연 우리는 사람을 사랑하는가, 아니면 조건을 충족한 사람만을 사랑하는가?”


사랑은 제도 속에서 종종 길을 잃는다.

자본주의는 사랑조차 평가하고, 등급을 매기며, 실현 가능성과 안정성을 따진다.

나는 그런 현실 속에서, 감정은 있으되 자리는 없는 존재가 된다.


그럴 때 나는 실감한다.

‘금치산자’라는 단어는 내 감정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법적 비유이고,

‘마약’이라는 말은 나와 함께하는 삶이 용납되지 않는 위험이라는 사회적 선언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사랑을 믿는다.

다만, 그 사랑이 이 사회에서 허용되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결심한다.

나는 개랑 살 거다.

사랑이 자본과 제도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면,

그 허락 없는 자리를 나는 다른 존재와 채우겠다.

무조건적인 존재와.

계약 없는 애정과 함께.

말이 통하지 않아도, 오히려 그 말 없는 위로가

사람보다 더 사람 같을 수 있기에.


개랑 살겠다는 선언은 나의 퇴각이 아니다.

이것은 차라리, 조건 없는 삶에 대한 마지막 남은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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