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히 신기한 일이다.
음악은 언제나 같지만, 내가 다르게 듣는다.
슬플 땐 선율이 울고, 기쁠 땐 리듬이 웃는다.
어느 날엔 같은 음이 나를 쓰다듬고,
또 어떤 날엔 날카로운 칼처럼 가슴을 찌른다.
나는 나의 감정을 통해 세계를 듣고 본다.
그러므로 음악은 내 감정의 거울일 뿐이다.
요즘의 나는 조금 달라졌다.
살이 오르고, 웃음이 늘었고,
이상하게도 세상이 그저 세상처럼 보인다.
생각이 깊어지지 않는다.
바람은 바람이고, 나무는 나무일 뿐.
예전엔 그 바람에서 허무를 읽고,
나무의 가지에서 존재의 분기점을 상상했는데.
감수성이 쾌활해질수록
삶은 살 만하지만, 예술은 멀어진다.
지금 나는 너무 건강하고, 너무 평화롭고, 너무 ‘산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럴수록 나의 문장은 침묵한다.
예술은 언제나 병들어 있던 나에게서 솟아났다.
뼈가 앙상해질 때, 생각이 칼처럼 날카로워질 때,
나는 더 깊이 보고, 더 멀리 들었다.
아마도 예술은 그런 병적 상태의 산물이 아닐까.
과잉 각성, 지나친 감각, 제어되지 않는 감정.
그 속에서 나는 나를 잃었고, 그래서 무언가를 표현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진실일까?
예술은 반드시 병에서만 피어나는가?
아니면 우리는 고통의 예술만을 더 강하게 기억하는 것일까?
예술은 고통으로부터도, 환희로부터도 태어난다.
문제는 그 사이, 미지근한 무감각이다.
그 중간의 온도는 어떤 극점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곳엔 고통의 절규도, 환희의 비상도 없다.
예술은 미지근한 감정 속에서는 길을 잃는다.
그러니 나는 결심한다.
더 이상 고통의 늪에서만 예술을 찾지 않겠다고.
이제는 환희로 예술을 다시 세워야 한다.
기쁨이 깊어지면, 그것도 고통처럼 세계를 뚫는다.
진정한 기쁨은 얕지 않다.
기쁨은 삶을 투명하게 만들고, 그 투명함 안에서 예술은 다시 태어난다.
삶이 편안해질수록 나는 두려워진다.
나의 예술이 사라질까봐.
그러나, 어쩌면 그것은 새로운 예술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병든 언어는 절규였지만,
건강한 언어는 침묵 속의 화해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