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락과 소유의 문명학

by 신성규

가끔 생각한다.

인간의 구원은 쾌락에서 나올 수도 있겠다고.

그 순간만큼은 자아의 무게도, 세계의 고통도 사라진다.

쾌락은 우리를 잠시나마 인간의 조건에서 해방시킨다.

그러나 문제는, 그 쾌락이 소유의 개념으로 전환될 때부터 시작된다.

사람들은 쾌락을 ‘소유하려’ 하고, ‘지속시키려’ 한다.

그렇게 욕망은 질투가 되고, 소유가 되며, 끝없는 불안이 된다.


쾌락은 본래 순간적인 것이다.

그것은 경험이자 현상이다.

그러나 소유하려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쾌락이 아니라 집착이 된다.

아마 그래서일까.

인간의 집단적 쾌락이 종종 마약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는 것도.

그건 단순한 문란이나 퇴폐가 아니다.

어쩌면 인간이 본능적으로 ‘구원’을 갈구하며 진보하려는 몸짓일지도 모른다.

현실의 굴레를 벗어나 잠깐이나마 새로운 차원을 경험하고 싶어서.

우리가 아이를 보고 경탄하고, 동물 벽화를 보고 경탄했던 그 옛날처럼 말이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감각의 원형적 기쁨 아닐까.


하지만 우리의 문명은 역설적이다.

우리는 쾌락을 쫓으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규제하고 억압한다.

기쁨은 결국 제도와 관습에 가로막히고, 그 속에서 인간은 점점 더 불행해진다.

아이를 보고 순수하게 경탄했던 그 마음조차 이제는 ‘소유’의 틀로 갇히고 만다.

그렇게 문명은 인간의 쾌락을 억누르며, 동시에 불행으로 몰아넣는다.


나는 이 아이러니가 인간의 본질적 슬픔이라고 느낀다.

구원은 언제나 쾌락의 순간에 있었지만, 우리는 그것을 소유하려다 스스로를 갉아먹는다.

쾌락은 우리를 해방시키지만, 소유는 우리를 가두는 족쇄가 된다.

그리고 이 문명은 그 족쇄를 더욱 정교하게 만들어간다.


아마도 인간은 태생적으로 ‘소유’를 멈출 수 없는 존재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짧은 쾌락의 순간만큼은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고 싶다.

그 순간만큼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자유롭다고.

그것이 문명이 가져다주는 불행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우리의 작은 구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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