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스에서 사무실까지
우리는 오늘도 사무실로 향한다. 책상이 있고, 상사가 있고, 회의가 있고, 인사 평가가 있다. 때론 눈치를 보고, 때론 타인을 이겨야 하며, ‘성과’를 측정당한다.
그런데 문득, 이 조직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그리고 나는 왜 여기에 소속되어 있는가?
이 질문에, 기원전 4세기의 한 철학자는 답할 준비가 되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다.
“인간은 폴리스를 떠나선 살 수 없는 존재다.”
여기서 말하는 ‘폴리스’는 단순히 도시국가가 아니다.
그는 정치학‘과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폴리스를
최고선(행복)을 실현할 수 있는 공동체라고 보았다.
개인은 그저 살아가기 위해 가족과 마을을 구성한다.
그러나 ‘잘 살기 위해’, 즉 덕과 이성을 실현하기 위해
우리는 더 높은 수준의 공동체, 곧 폴리스를 구성한다.
폴리스는 단순한 행정 단위가 아니다.
그것은 삶의 의미와 목적을 실현하는 제도적 틀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정치적 삶은 곧 윤리적 삶이며,
윤리적 삶은 공동체 안에서만 가능하다.
현대에 와서 우리는 폴리스에 살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회사’라는 이름의 새로운 구조 속에 있다.
그렇다면 기업 조직은 오늘날의 폴리스일 수 있는가?
겉보기엔 유사한 점이 많다.
소속감을 요구한다
질서와 규범이 있다
구성원 간 협력이 이뤄진다
구성원은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며 전체를 유지한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폴리스는 ‘최고선’을 목표로 했고,
기업은 ‘이윤’ 또는 ‘성과’라는 특정 효율을 목표로 한다.
폴리스는 인간의 ’덕‘을 실현할 수 있는 공간이지만,
기업은 인간을 도구화 하는 구조가 될 수 있다.
우리는 회사를 통해 ‘더 나은 인간’이 되는가? 아니면 ‘더 유능한 기능’이 되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윤리적 삶을 세 가지 차원으로 보았다.
개인의 습관과 덕
타인과의 관계
공동체 전체와의 조화
그러나 오늘날 많은 기업은 이 세 가지를 분리한다.
덕은 사적 영역으로 밀려나고, 타인은 경쟁자가 되며, 공동체는 수단에 불과하다.
즉, 인간의 통합적 윤리적 삶은 ‘성과 평가’라는 추상적 기준 앞에서 해체된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적 관점에서 보면, 비윤리적일 뿐 아니라 비인간적이다.
그렇다면 ‘좋은 조직’이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음’을 단지 도덕적 명분으로 보지 않았다.
그에게 좋은 것은 목적에 부합하는 것이다.
좋은 칼은 잘 베는 칼이다.
좋은 인간은 이성적 덕을 실현하는 존재다.
그렇다면 좋은 조직은 무엇인가?
그 답은 다음과 같다.
“구성원이 인간다운 삶을 실현하도록 돕는 구조.”
이는 단지 복지나 인사 제도의 문제가 아니다.
그 조직이 도구의 세계를 넘어서 ‘공동선’을 설정하고 있는가의 문제다.
오늘날 기업 조직은 새로운 폴리스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위해선
구성원을 소비하지 않고 성장시키는 윤리적 틀을 회복해야 한다.
고대의 폴리스는 한계도 많았지만, 분명한 것이 있었다.
공동체의 목적은 단지 생존이 아니라 ‘탁월한 삶’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묻는다.
“성과가 중요한 거야, 아니면 사람이 중요한 거야?”
그 질문은 애초에 아리스토텔레스적 세계에선 성립되지 않는다.
성과와 인간은 분리될 수 없다.
왜냐하면, 가장 탁월한 성과는 ‘가장 인간다운 삶’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오래된 질문과 다시 마주해야 한다.
나는 이 조직을 통해 어떤 인간이 되고 있는가?
이 조직은 나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우리는 함께 ‘좋은 삶’을 위한 공동체를 만들고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는 순간,
우리는 단지 회사를 다니는 것이 아니라
철학을 살고 있는 것이 된다.
그리고 그 철학의 시작은,
기원전 4세기 아테네에서,
한 사람의 질문으로부터 출발했다.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