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진보했다. 분명히 그랬다.
병은 줄었고, 수명은 길어졌고, 인터넷은 세상의 문을 열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불행해졌다.
왜일까?
루소는 대답한다.
문명의 진보는 인간을 자유롭게 만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타인의 시선에 예속된 존재로 만든 것이라고.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으나, 도처에서 사슬에 묶여 있다.”
— 사회계약론
이는 단순한 정치적 언급이 아니다.
루소에게 사슬은 관계적 구속이고, 인식의 왜곡이다.
‘타인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병’이야말로,
문명화된 인간의 진짜 감옥이다.
루소는 문명의 진보를 통렬히 비판한다.
그는 최초의 불평등이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 시작되었다고 했다.
“이 땅은 내 것이다.”라고 말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 말을 믿은 순간부터.
소유의 개념이 탄생하면서
경계가 생기고, 경쟁이 시작되었으며,
이제 인간은 자연 속의 존재가 아니라 사회 속의 비교 대상이 되었다.
그는 원시 상태의 인간을 “고독하고, 평화로우며, 자기완결적”인 존재로 보았다.
그러나 문명은 인간을 타인의 시선과 지위를 통해 자신을 측정하게 만들었다.
야만인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본다.
문명인은 남이 어떻게 보는지를 먼저 생각한다.
그래서 문명인은 자신이 아닌 ‘자기 이미지’를 위해 살게 된다.
이 이미지의 최전선이 오늘날의 자기계발 담론이다.
오늘 우리는 끊임없이 나를 갈아 끼운다.
더 효율적인 내가 되기 위해, 더 매력적인 내가 되기 위해,
더 고평가되는 자산으로서의 나를 만들기 위해.
하지만 루소는 묻는다.
그 ‘성장’은 과연 너의 의지인가?
아니면 타인의 인정이라는 허상을 좇는 굴레인가?
현대의 자기계발은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한 길이 아니라,
경쟁 가능한 타인의 형태로 자신을 맞추는 과정이다.
그 결과, 우리는 아무도 아닌 사람이 되어간다.
자기 복제의 유령들, 서로 비슷한 문장을 쓰고,
비슷한 옷을 입고, 비슷한 시간을 살아간다.
루소는 단순한 자연주의자가 아니다.
그의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말은, 정치적 실천이 아니라 인식의 회복이다.
“인간은 어떤 존재로 태어났고, 어떤 존재로 길들여졌는가?”
이 질문이 루소 철학의 출발점이다.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질문은 같다.
“나는 정말 나인가? 아니면, 만들어진 자아의 합성물인가?”
“내가 욕망하는 그것은, 정말 나의 욕망인가?”
루소는 우리에게 정치보다 먼저 인간의 내면에 대해 다시 성찰하라고 말한다.
그 내면은 타인의 시선이 침투하기 전의 상태여야 한다.
루소는 ’에밀‘에서 교육을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닌
인간의 자연성을 보존하는 기술로 본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육은
비교 우위 있는 상품을 생산하는 공장이 되었다.
아이는 태어나기 전부터 경쟁하고,
청년은 입사 전부터 비교당하며,
직장인은 승진을 위해 ‘정체성’을 포기한다.
이 사회는 루소가 경고한 병든 문명의 완성형이다.
그러나 희망은 있다.
루소는 문명이 인간을 망치긴 했지만,
인간은 스스로를 다시 재구성할 수 있는 존재라고 본다.
그 첫걸음은 자기 욕망을 의심하는 것이다.
루소는 지금도 살아 있다.
자기계발이라는 의례, 경쟁이라는 종교,
인정욕이라는 불안을
이보다 더 정교하게 해체한 철학자는 드물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고등학교 졸업 후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문명과 인간 사이의 전장을 관통하는
영원한 질문이다.
루소는 말한다.
자유는 되찾아야 할 것이 아니라,
이미 잃어버린 것임을 자각하는 데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