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너무 많은 것에 반응하며 살아간다.
뉴스 알림 한 줄에도 심장이 반응하고,
SNS의 누군가의 말 한 줄에도 자존감이 출렁인다.
그의 삶은 나보다 풍요로워 보이고,
내가 하지 않은 선택들이 더 ‘좋은 길’로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는 ‘살아간다’기보다, 반응하면서 살아남으려 애쓴다.
이런 시대에, 한 문장이 떠오른다.
“사물에 반응하지 말고, 그것들을 이해하라.”
스토아 철학의 핵심, 아파테이아.
오늘 우리가 겪는 불안, 강박, 과잉 반응의 세계에
이 고대의 태도는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아파테이아는 흔히 “무감정” 혹은 “무심함”으로 번역되지만,
그 본래 의미는 더 깊다.
스토아 철학자들이 말한 아파테이아는
‘파토스’, 즉 불합리한 정념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아파테이아는 냉정함이 아니라, 자기 통제 속의 평정이다.
감정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것이다.
이는 세상에 대한 무관심이 아니라, 내면의 주도권을 되찾는 것이다.
누가 나를 칭찬하든 욕하든,
세상의 조건이 바뀌든 변하지 않든,
그 모든 외부의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세우는 것.
오늘날 우리의 불안은 단순히 감정의 문제가 아니다.
“비교”의 시대에, 나의 위치는 항상 부족하다.
“속도”의 사회에서, 나의 걸음은 항상 늦는다.
“성과” 중심의 조직에서, 나의 존재는 늘 조건부다.
우리는 타인의 시선, 미래의 불확실성,
스스로 만든 이상적인 자아에 끊임없이 감정적으로 반응한다.
그 반응은 점점 무기력이 되고,
무기력은 자책이 되고,
자책은 다시 강박이 되어 우리를 몰아친다.
스토아 철학은 여기서 한 발 물러선다.
“그것은 너의 통제 밖에 있다. 그러므로 괴로워할 이유도 없다.”
스토아는 삶의 모든 고통은 ‘통제 불가능한 것’을 통제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우리는 타인의 감정,
미래의 확률,
과거의 선택,
그 모든 것을 통제하려 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우리의 의지 밖에 있다.
에픽테토스는 말했다.
“나는 나의 의견, 욕구, 회피, 그리고 나의 선택만을 통제할 수 있다.”
이것은 체념이 아니다.
이는 통제 가능한 것에 모든 에너지를 집중하는 용기이다.
우리가 다시 집중해야 할 것은
내가 오늘 하는 생각
내가 선택하는 행동
내가 품는 태도
이것이다. 외부가 아니라, 내면의 방향.
오늘날 우리는 병리적 감정 과잉의 시대에 살고 있다.
불안 장애, 강박, 분노, 우울은
단지 정신의 병이 아니라 세계와의 감정적 관계 방식의 실패다.
스토아는 감정을 억누르지 않는다.
그들은 감정을 분석하고, 재구성하고, 스스로를 가르치라고 말한다.
“사건 그 자체가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에 대한 나의 판단이 나를 괴롭게 한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이 문장은 정신 의학의 인지 치료와 유사하다.
감정은 제거해야 할 것이 아니라,
새롭게 해석하고 길들일 수 있는 것이다.
아파테이아란, 바로 그 해석의 기술이며,
내면에 자율성을 회복하는 존엄의 철학이다.
스토아 철학을 냉소주의로 오해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스토아는 세상에서 도망치기 위한 철학이 아니다.
오히려 세상 속에 머물며 무너지지 않는 기술이다.
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전쟁과 반란 속에서 ’명상록‘을 썼고,
노예였던 에픽테토스는 자유보다 의식을 더 중요하게 여겼으며,
세네카는 제국의 혼란 속에서도 통찰을 놓지 않았다.
이들은 고립된 자아가 아니라, 세계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인간을 추구했다.
아파테이아는 하루아침에 오지 않는다.
그것은 훈련과 반복,
매일의 질문과 선택 속에서 만들어진다.
오늘 나는 어떤 감정에 반응했는가?
그 감정은 정당했는가, 습관적이었는가?
나는 그 사건을 어떻게 해석했는가?
나는 통제할 수 없는 것에 에너지를 쓰고 있는가?
이 질문을 통해 우리는 하루하루,
고요한 내면으로 돌아오는 길을 연습할 수 있다.
우리는 어쩌면 스토아 철학의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불확실한 사회, 과잉된 정보, 무한 비교의 구조.
이 시대야말로 외부가 아닌 내면의 철학이 요구되는 순간이다.
스토아는 우리에게 ‘반응하는 자’가 아니라
‘선택하는 자’가 되라고 말한다.
그것이 아파테이아이고,
그것이 곧 존엄과 평정의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