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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인드카소 Oct 22. 2023

핸드메이드 팔려도 슬프고, 안 팔려도 슬픈 것

퇴직금 회수 완료 시점을 조금이라도 앞당기기 위해서 평일과 주말 구분 없이 판매하러 다녀야 했다. 그래서 플리마켓과 백화점 디자이너 마켓을 번갈아가며 주 7일 모두 참가하는 일정을 잡았다. 제대로 쉬어본 날이 거의 없었다. 거기다 백화점 디자이너 마켓은 짧게는 3일 길게는 2주까지도 이어졌는데, 이렇게 판매 기간이 길어지다 보니 '신상품이 필요하다'는 새로운 고민까지 생기게 되었다. 매번 똑같은 제품만 팔기에는 한계가 느껴진 것이다. 



첫 번째 지갑들의 대량 생산으로 마음고생이 컸고, 생 고생 중이었다. 물론 수중에 돈도 없었기 때문에 공장에 의뢰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내가 지금 여기에서 갖고 있는 것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어떻게 신상품을 만들 수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방법이 딱히 없었다. 결국 내 손으로 만들어야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가죽 자투리로 목걸이와 팔찌, 카드 지갑과 동전 키링 등 소품 위주로 만들기 시작했다. 한 땀 한 땀 직접 제작하는 100% 핸드메이드였다. 어디에서 몇 개가 만들어졌든 새로운 제품들이 구성되니, 판매할 때 구경거리가 되었고, 간간히 판매가 되는 것도 괜찮았다. 


그렇게 며칠을 판매해 보니 조금 더 새로운 것이 필요하다고 느껴졌다. 이를테면 가방과 같은 큰 것이었다. 어떻게 가방을 신상품으로 출시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결국 돈이 없어서 '그냥 한번 만들어보자'는 생각에 이르렀다. 국내 매장에서 미싱기를 사면 편하긴 하겠지만, 훨씬 더 비싸므로 큰 마음먹고 중국 직구로 가정용 싱거 미싱을 결제했다. 


미싱을 배워본 적이 없었다. 당연히 다룰 줄 몰랐다. 신상품 제작을 위해 그런 것과 상관없이 구매했다. 물 건너 미싱기가 우리 집에 도착한 날부터 새로운 고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 마주한 복잡한 무섭게 생긴 재봉틀. 

사실 나는 재봉틀의 기본 구조나 명칭은 물론, ㅈ자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이것은 매뉴얼의 첫 페이지부터 정독해야 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명칭부터 하나하나 반복해서 익히고, 실 끼우는 법도 여러 번 연습해서 미싱기 사용법을 독학하기 시작했다.  


원인도 모른 채 마구잡이로 실이 엉켜버리면 나도 엉엉 울고 싶어졌다. 내 마음도 모르고 실은 자주 엉켰고, 바늘은 자주 부러졌다. 내가 미싱기를 붙잡고 울었던 날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미싱기로 인한 자잘한 사건 발생 빈도와 비례했다. 문제를 만드는 사람도 나, 해결해야만 하는 사람도 나였다. 

옆에 차근차근 알려줄 사람이 없었다. 미싱 관련 카페에 질문을 남기거나 공장 사장님한테 물어봐서 겨우겨우 하나씩 해결해 나가는 수밖에! 신기한 것은 이것도 기술이라고 조금씩 미싱 다루는 일에 익숙해졌고, 친해졌다. 서서히 실이 덜 엉키는 요령을 터득해 나갈 수 있었다.


그렇다고 신상품으로 판매할 수 있을 있을 만큼 상품성 있게 잘 만들지는 못했다. 테스트 삼아 신설동 원단 시장에서 1-2yd (야드 원단 단위) 사다가 가방을 하나씩 만들어 보았다. 가죽은 금액 및 제작의 위험 부담이 크니까 원단이어야 했다. 그리고 내가 만들 수 있는 사각형 스타일의 숄더백으로 간단하게 디자인했다. 


여러 번 망치면서 시행착오를 겪다 보니 그럴싸한 가방의 형태가 잡혔다. 그렇게 만들어 낸 가방들을 들고 프리마켓과 디자이너 마켓은 물론 국제 핸드메이드 페어에도 참가했다. 완판은 못했지만, 미싱기의 기본적인 사용법을 스스로 정복했다는 생각에 약간의 자신감이 충전되었다. 


내가 만들 수 있는 수준의 스타일로 디자인했다. 지퍼달기와 같은 고난도 기술은 당연히 패스했다. 젊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데, 대한민국의 많은 아줌마들은 지퍼가 없다는 꼭 같은 말을 하곤 했다. 다 쏟아지거나 도둑맞는다나... 가방으로 쥐불 놀이하 듯 빙빙 돌리는 것도 아니고, 매고 있는 가방 안에 물건을 도둑맞을 만큼 운이 없지는 않으실 거라고 말씀은 드리지만, 걱정이 많은 사람들은 만지작만지작거리며 말만 많을 뿐 구매하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에게 설득해서 무리해서 판매하면 꼭 환불이라는 탈이 생긴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더 이상 판매하겠다고 힘 빼지 않기로 했다. 


불박 찍어서 가죽 라벨도 제작하고, 가방에 거는 가죽 장식도 직접 만들고, 어깨 끈 끝부분은 가죽으로 마감해서 손바느질하는 등 내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어렵지 않게 만들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나에게 핸드메이드란 팔려도 슬프고, 안 팔려도 슬픈 것이었다. 


판매가 되면 돈도 벌고 두 손 가볍게 귀가할 수 있었지만, 밤새 내일 판매할 가방을 또 만들어야 했고, 안 팔리면 밤에 만들지 않아서 쉴 수 있었지만, 고스란히 들고 와야 하는 마음의 부담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직구로 미싱기를 구매하고 난 뒤, 테스트로 삼아 가방을 만들어 보기 시작했고, 2-3개월 동안 약 55개의 숄더 백을 제작했다. 시즌을 타는 여름 가방이 남아있긴 해도 오프라인에서 80% 이상 판매로 이어졌다. 이후 폐업하기 전까지 100개에 가까운 가방을 내 손으로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팔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가방이 팔려도 슬프고 안 팔려도 슬펐지만, 미싱기의 기본적인 사용법을 스스로 정복했다는 생각에 자신감이 충전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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