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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mile Aug 10. 2024

재벌가의 안주인

feat 1992년 비자금

유학을 온 후 미국 생활에 점차 익숙해질 때쯤 학교에서 한 남자를 소개받았다. 석사를 마치고 박사 과정 때였다. 미국에서의 학업은 자본주의 미국이라는 나라를 다시 보게 될 만큼 순조로웠다. 석사도 박사도 부유하기만 하다면, 미국에 도움이 될 만한 권력이 있기만 한다면, 거기에다가 공부하는 시늉이라도 낼 의사만 있다면, 동양인이라도 의자 하나 더 놓아 끼워주는 것이 뭐 어렵겠냐는 듯이 내 기꺼이 내 자리를 마련해 주고 있었다. 박사과정에는 나처럼 부유하거나 또는 권력을 가진 집안의 자제들이 많았다. 소개받은 그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다.


나와 마찬가지로 그도 미국생활에 아무 문제가 없을 정도로 힘과 돈에 여유가 있는 것 같았다. 다만 약간 다른 점은 나와 달리 전혀 공부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는 것이다. 그는 그럴 만도 한 것이 아마 나보다 훨씬 더 부유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때 비로소 깨달았지만 내가 부유하다고 이야기한 것은 그의 입장에서는 지나가던 소가 웃을 일이었다. 나는 사실 그렇게 부유하지 않았고, 부유하다고 느낀 것은 나와 아빠의 삶의 수준이 이제 먹고살만하게 급격히 나아진 것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이제 더 높은 계급 대신 새로운 목표로 삼은 돈이라는 목표에 맞게 딱 맞는 남자였다.


그는 대학원이고 박사고 전혀 관심 없이 공부는 전혀 하지 않고 슬렁슬렁 시간을 때우는 한량 같이 보였지만 내가 그에 비하여 꽤 열심히 공부하는 듯한 모습은 좋아했다. 나는 그가 돈이 아주 많은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가진 것에 비해 무척 검소하게 보이려고 노력하는 겸손함이 좋았다. 그와 데이트는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아주 평범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시종들을 쭉 거느리고 만찬을 즐기는 왕자와 그에게 초대된 공주의 모습도 아니었다. 그는 이국만리에서 연애라는 미명하에 외로움과 무료함을 달래줄 흔치 않은 훌륭한 파트너였다. 그렇다고 외국임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불타올라 선을 넘을 사이도 아니었는데 서로 항상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 그때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여겼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서로 뒤에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어서 그랬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아빠의 눈치를 보고 있어서 그랬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같은 대학원에서 만난 것부터 절대 우연일 리가 없었다. 훗날 기사에 보면 아주 자연스럽게 만난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그것은 전혀 자연스러운 일이 될 수가 없었다. 그는 장사꾼의 집안 출신이었고 어떻게든 나와의 거래, 아니 아빠와의 거래를 성사시켜야 할 임무를 안고 해외영업의 최전선에 와 있는 지사장 같은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국내 거래의 카운터파트너였던 아빠도 마찬가지였다. 상대방에게 미래의 더욱더 큰 부를 약속할 만한 매력을 어필해야 했고 나는 꽤 매력적인 상품이었음에 분명했다. 그렇다고 나는 아빠가 나를 거래의 물건 삼아 팔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 또한 내 목표에 분명히 돈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거래를 거부하고 영화에서나 있을 법한 평범한 기자를 만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나는 로마의 휴일의 오드리 헵번이 맞았지만 상대는 반드시 기자 그레고리 팩이 아니라 왕자여야 했다. 그래도 그는 나를 오드리 헵번 대하듯이 극진히 대우해 줬다. 그때처럼 모든 것이 순조로왔던 때가 없었다. 나는 오드리 헵번 공주였고 그것은 아빠가 곧 대통령이 될 위치여서 가능했다. 하지만 그는 왕자는 맞았지만 그레고리 팩은 아니었다.


아빠는 정말로 대통령이 되었고 나는 공주가 되었다. 아빠가 대통령이 되자마자 그와의 결혼은 그동안 협상 중이었던 마지막 조건이 서로의 우호적인 양보로 타결되어 이 거래가 기쁘게 성사되었다는 듯이 급물살을 탔다. 이제 결혼을 서두르는 쪽은 그의 집안쪽이었다. 아빠도 망설일 이유가 없었고 나도 그레고리 팩이 있는 것도 아닌데 기꺼이 목표를 향해 전진해야 했다. 어릴 적 가보고 싶어 했던 청와대가 꿈처럼 결혼식 장소가 되다니 믿기지 않았다. 주례는 국무총리님이 해 주시기로 했다. 여기저기서 '세기의 결혼'이라 대서 특필되었다. 아빠는 대통령이고 나는 세기의 결혼의 주인공이 되다니, 어릴 적 동화책에서 읽었던 공주의 삶은 이런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드리 헵번이 부럽지 않았다.


나는 벌써 인생의 모든 목표를 이루었다. 첫 번째 목표였던 가장 높은 계급에 도달한 것은 물론이고 두 번째 목표로 삼았던 돈에 대해서도 국내 최고의 재벌가의 안주인이 된 것이었으니 말이다. 에베레스트 최고봉을 별로 힘도 들이지 않고 최소연소 정복한 것이나 마찬가지란 생각이 들었다. 오드리 헵번은 그레고리 팩이 아니라 왕자와 결혼하는 것이 맞았다. 영화에서 둘은 서로 모른 척하지 않았던가? 이 모든 것은 다 아빠가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이제 아빠는 사위의 집안을 대한민국 최고의 부자의 집안으로 만들어 주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그것은 결국 내 꿈을 이루기 위한 일이기도 했다. 그는 아빠로부터 각종 사업권을 선물로 받아서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이 왕국의 수많은 왕자 중에서 결국 왕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얻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 그는 이제 아빠를 대신해서 나를 지켜줄 것이고 나는 왕비가 되어 이 평온하고 조용한 삶은 계속될 것이었다.


그때 아빠는 퇴임 이후를 위해 상당한 사업자금을 그에게 맡겼다고 했다. 그것은 아빠의 퇴임 이후 에도 나를 영원히 지켜줄 밑천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이것이 아빠가 끝까지 나에게 나주고간 마지막 선물이었다. 그것이 너무나도 큰 선물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고 난 후였지만 이때도 아빠의 계획은 탁월했다. 계급은 아빠가 군대의 최고의 지휘에 오른 후 며칠 만에 내려온 것을 보고 그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익히 배웠다. 그 보다 높은 대통령의 권력과 계급이라고 해도 그 역시 유한하기는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러나 돈이라는 권력과 계급은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영원히 세습될 수 있는 것이었고 그와 그의 집안을 통하여 그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영원한 권력과 계급을 가져서 인지 그와 그의 집안사람들은 그동안 내가 알아왔던 군인들과는 전혀 또 다른 모습이었다. 물론 그들은 여전히 아빠의 눈치를 살폈고 아빠에게 상당한 이권과 사업자금 마저 받아 챙겼기에 나는 그의 집안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될 평온하고 조용한 삶을 제공받았지만 겉으로만 그러했을 뿐 그들의 욕망의 속내는 끝이 없어 보였다. 그들은 반드시 대가를 받아내는 장사치였고 언젠가는 내게도 제공한 것의 이자에 이자까지 받아낼 것이었다.


그래도 그때는 지금껏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잔잔하기만 했던 나의 삶에 곧 풍랑이 몰아치리라는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내 삶은 늘 성공한 쿠데타 같은 것이었고, 아빠가 구축한 그 단단한 진지에서 또 다른 쿠데타 같은 절대 일어날 수가 없어 보였다. 아빠는 최고 권력이 되어 철통 같이 이 나라와 나를 지키고 있지 않는가? 세상이 아무리 빠르게 변하고는 있다 하지만 아직 군인의 총, 또는 권력의 칼은 상인의 돈을 언제든지 요구할 수 있는 때였다. 그러나 총칼의 힘은 녹아내리고 있었고 돈의 힘은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그래서 아빠와 나의 목표와 선택도 옳은 것이었다리는 강한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에는 대가를, 그것도 이자에 이자를 더해서 지독히 치러야 한다는 기본을 자본주의의 중심 미국까지 가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박사까지 해 놓고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기본을 망각하고 있기는 역시 같은 대학원을 나온 그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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