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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mile Aug 03. 2024

대통령의 딸

feat 1987년 6.29


대학에 입학한 지 2년이 지난 즈음 아빠는 유학을 가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어차피 학교는 시위로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있었고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아빠의 높은 계급이 처음으로 학교 생활이라는 내 삶에 오히려 방해가 되는 순간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삶의 손끝도 적시지 못한 작은 물방울에 불과할 뿐이었다. 아빠를 싫어하는 대학생들이 보이지 않는 곳, 간단하게 외국에 있는 대학으로 가면 될 일이었으니까. 역시 아빠의 선택은 탁월했다. 아빠가 해외 여러 곳을 다니며 많은 사진과 선물들을 보여주었기에 외국에 있는 대학에 다니고 외국에서 생활하는 것에 대한 기대감도 있었다. 웬만한 대학은 아빠가 말만 하면 다 갈 수 있으며 학비와 같은 돈 걱정은 이제 할 필요가 없을 만큼 집안은 이제 여유가 넘쳤다.


그런데 이번에는 대학에서 전공했던 섬유공학 같은 쪽이 아닌 전혀 다른 분야인 경제학이 좋겠다고 아빠는 말했다. 대학 쪽에 이미 이야기는 다 해 놓았으니 가서 다니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아빠는 세상을 바로 알아야 한다며 경제학을 추천했지만 그것이 훗날의 아빠의 큰 그림인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다만 어렴풋이 아빠의 목표가 계급에서 돈으로 이동한 것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이제 나의 목표도 자연스레 계급에서 돈으로 이동할 시간이 온 것이었고 아빠의 탁월한 선택은 언제나 옳았기에 곧 나의 선택도 옳을 것이었다.


미국 생활은 한국에서 생활할 때보다 훨씬 나았다. 우선 주위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고 아빠가 역시 손을 써놓은 덕분에 생활에도 전혀 불편이 없었다. 한국이란 나라는 미국에서는 아직 낯선 후진국에 불과했고 인종 차별이 있을 수도 있을 일이었지만 그 역시 아빠가 힘과 돈이 없을 때 이야기지 우리 같은 신분, 즉 높은 계급에 있을 때는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은 내가 꿈꾸던 나라였다. 그동안 내가 가진 것이 많다고, 거의 한국에서는 최고의 계급이라고 생각했는데 밖에 나와보니 그것이 아니었다. 이 나라는 높은 계급 말고도 돈이 힘을 의미하는 진정한 자본주의의 나라였고 아직 계급이 힘인 한국과는 조금 달라 보였다. 그리고 그 자본주의를 공부하는 경제학이라는 전공은 정말 딱 맞는 학문이었다.


아빠는 그 사이 공무원을 그만두고 본격적인 정치에 뛰어들고 있었다. 장관도 단순 공무원은 아니었고 정치인에 가까웠지만 입당을 하고 정치에 더 깊숙이 발을 들여놓는다는 것은 군인이나 공무원 보다도 더욱 위험하게도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당 대표, 아빠는 언제나 최고의 계급을 지향하는 확고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도 가장 최고의 계급을 지향하는 삶의 목표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덕분에 미국 생활은 순조로웠고 이 자본주의의 중심의 나라에서 새로운 목표인 돈의 본질에 대하여 공부하는 것은 무척 흥미로운 일이었다. 그렇게 늘 원하던 평온하고 조용한 내 삶에 파도란 전혀 있을 수 없는 시간이 지속되었다.


그러나 아빠가 있는 국내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시위가 넘쳐나고 어지러운 세상이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여전히 많은 사람이 다치거나 죽는 일이 여전한 것 같았으며, 혹여 아빠가 그 중심에 있지 않나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에 온 것은 역시 잘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국내의 바람 잘날 없는 일은 나에게는 알바 아니었다. 그러나 아빠가 헌신하여 유치한 올림픽을 앞둔 시점이었기에 자칫 그러한 소요가 올림픽에 미칠 영향을 걱정하는 듯 보였다. 올림픽은 경제적으로도 중요한 행사였을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특히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서 예전과 같이 아무리 군인이라도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함부로 나설 수 없었고 이제 더 이상 군인이 아닌 아빠도 예전처럼 행동할 수는 없어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빠가 TV에 등장해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하더니 대통령 선거에 출마를 선언하고 나섰다. 놀랍게도 직선제로 대통령을 뽑고, 자유로운 출마와 경쟁을 보장하며, 경쟁자를 사면하고, 인권침해를 방지하고,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며, 지방과 대학의 자율도 보장하고, 정당의 활동을 보장하며, 폭력배들을 소통하여 사회 정화를 실현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놀랍게도 좋은 내용은 다 들어가 있었는데 그동안 아빠가 행동해 온 군인의 삶과는 전혀 거리가 먼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미국에 와 보니 이해가 가기도 했다. 자본주의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돈으로 해결하면 될 것을 굳이 군인이나 폭력으로 해결하는 것은 그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이제 곧 올림픽을 개최해야 할 나라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특히 웃었던 것은 그동안 아빠와 내가 그토록 삶의 목표로 삼았던 계급에 대한 것을 지운채 보통사람을 내세우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전혀 보통사람 같은 것은 될 생각이 없었다. 보통사람이라니 전혀 아빠답지 않은 문구였지만 그것은 꽤 사람들에게는 먹히는 듯 보였고 아빠는 언제나 그랬듯이 옳은 판단을 했고 결국 대통령이 되었다. "보통사람은 무슨?" 나와 마찬가지로 아빠는 드디어 가장 높은 계급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어릴 적 가 보기를 소망했던 청와대를 집으로 삼을 수 있었고, 이제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계급에 이르렀으니 첫번째 목표는 이루었고 이제 돈 만이 유일한 목표가 되었다.


동지 여러분. 그리고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이제 우리나라의 장래의 문제에 대해 굳은 신념을 갖게 되었습니다. 국민들 사이에 쌓인 뿌리 깊은 갈등과 반목이 국가적인 위기로 나타난 이 시대적 상황에서 정치인의 진정한 사명에 대해 깊은 사색과 숱한 번뇌를 하여 왔습니다. 또한 학계, 언론계, 경제계, 종교계, 근로자, 청년, 학생 등 각계로부터 지혜를 구하고 또 국민의 뜻을 확인하였습니다. 오늘 저는 각계각층이 서로 사랑하고 화합하여 이 나라의 국민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정부 역시 국민들로부터 슬기와 용기와 진정한 힘을 얻을 수 있는 위대한 조국을 건설하기 위해서 비장한 각오로 역사와 국민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저의 구상을 주저 없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구상은 대통령 각하께 건의를 드릴 작정이고 당원 동지 그리고 국민 여러분의 뜨거운 뒷받침을 받아서 구체적으로 실현시킬 본인의 결심입니다.

첫째. 여야 합의 하에 조속히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하고 새 헌법에 의한 대통령 선거를 통해서 88년 2월 평화적인 정부이양을 실행하도록 해야겠습니다. 각료의 대다수가 국민이 직접 뽑은 국회의원으로 구성이 되어 자율과 개방을 바탕으로 대화와 타협 속에 민주책임정치에 가장 충실할 수 있는 의원내각제가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정착을 위해서 가장 바람직한 제도라는 저의 생각에 변화가 온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비록 아무리 좋은 제도라 할지라도 다수 국민이 당장 원하지 않는다면 필경 그 제도는 국민과 유리되고 이에 따라서 탄생되는 정부는 국민과 꿈과 아픔도 함께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의 이 시점에서 저는 사회적 혼란을 극복하고 국민적 화해를 이룩하기 위하여는 대통령 직선제를 택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국민은 나라의 주인이며 국민의 뜻은 모든 것에 우선하는 것입니다.

둘째. 직선제 개헌이라는 제도의 변경뿐만 아니라 이의 민주적 실천을 위하여는 자유로운 출마와 공정한 경쟁이 보장되어 국민의 올바른 심판을 받을 수 있는 내용으로 대통령 선거법을 개정하여야 한다고 봅니다. 또한 새로운 법에 따라서 선거운동 투, 개표과정 등에서 최대한의 공명정대한 선거관리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다만 직선제라 하더라도 근거 없는 인신공격과 대중선동으로 적개심을 불태우면서 혼란과 무질서가 판을 치게 되고 지역감정을 불러일으켜 결국 국가안정을 해치고 진정한 민주발전을 저해해서는 안 되며, 정책대결로 선의의 대결을 할 수 있는 기본 바탕이 전제되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 우리 정치권은 물론 모든 분야에 있어서의 반목과 대결이 과감히 제거가 되어 국민적 화해와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저는 그 과거가 어떠하였든 간에 김대중 씨도 사면, 복권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와 우리들 자손의 존립기반인 자유민주주의적 기본 질서를 부인한 반국가사범이나 살상, 방화, 파괴 등으로 국기를 흔들었던 극소수를 제외한 모든 시국 관련 사범들도 석방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들도 민주시민사회의 일원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과거가 없는 현재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분수령인 이 시점에서 우리 모두 크게 웃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렇게 된다면 차기 대통령 선거가 국민의 축제로 승화될 것이고 새로 출현하는 정부는 튼튼한 국민적 기반 위에 위대한 나라 건설에 더욱 매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넷째. 인간의 존엄성은 더욱 존중되어야 하며, 국민개개인의 기본적 인권은 최대한 신장되어야 합니다. 이번의 개헌에는 민정당이 주장한 구속적부심 전면 확대 등 기본권 강화 조항이 모두 포함되기를 기대합니다. 또한 정부는 인권침해 사례가 없도록 특별히 유의하여야 하며 민정당은 변호사회 등 인권단체와의 정기적 회합을 통하여 인권 침해 사례의 즉각적 시정과 제도적 개선을 촉구하는 등 실질적 효과 거양에 주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다섯째. 언론 자유의 창달을 위해서 관련 제도와 관행을 획기적으로 개선해야 합니다. 아무리 그 의도가 좋더라도 언론인 대부분의 비판의 표적이 되어온 언론기본법은 시급히 대폭 개정되거나 폐지되어 다른 법률로 대체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방 취재기자를 부활시키고 프레스카드 제도를 폐지하며 지면의 증면 등 언론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여야 합니다. 정부는 언론을 장악할 수도 없고 장악하려고 시도허여서도 아니 됩니다. 국가 안녕보장을 저해하지 않는 한 언론은 제약받아서는 아니 됩니다. 언론을 심판할 수 있는 것은 독립된 사법부와 개개인의 국민임을 다시 한번 상기합니다.

여섯째. 사회 각 부문의 자치와 자율은 최대한 보장되어야 합니다. 각 부문별로 자치와 자율의 확대는 다양하고 균형 있는 사회발전을 이룩하여 국가발전의 원동력이 된다고 했습니다. 개헌 절차에도 불구하고 지방의회구성은 예정대로 순조롭게 진행되어야 하고 시도단위 지방의회 구성도 곧이어 구체적으로 검토 추진하여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학문의 전당인 대학의 자율화와 교육자치도 조속히 실현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대학의 인사, 예산, 행정에 대한 자율성을 보장하고 입시, 졸업제도도 그와 같은 방향으로 개선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수한 많은 학생들이 학비 조달에 큰 어려움이 없도록 관련제도를 보완하고 예산에 반영하여야 할 것입니다.

일곱째. 정당의 건전한 활동이 보장되는 가운데 대화와 타협의 정치풍토가 조속히 마련되어야 합니다. 정당은 국리민복을 위하여 책임 있는 주장이나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국민의 정치적 의사를 형성하고 결집하는 민주적 조직체여야 합니다. 정당이 이러한 목적에 위배되지 않는 건전한 활동을 하는 한, 국가는 이를 보호하고 육성하는 데에 전력을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정당 역시 국법 질서를 준수하는 가운데 대화와 타협으로 사회의 갈등을 조화와 화합으로 이끌고 국론을 통일해 나아가는 정치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폭력을 써서라도 일방적인 주장만을 관철시키려는 야당이 있는 한 여당 역시 항상 양보할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여덟째. 밝고 맑은 사회건설을 위하여 과감한 사회 정화 조치를 강구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모든 시민이 안심하고 행복한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폭력배를 소탕하고 강도, 절도사범을 철저히 단속하는 등 서민생활 침해사범을 척결하고 우리 사회에 잔존하는 고질적인 비리와 모순을 과감히 시정해 나아가야 합니다. 근거 없는 유언비어가 추방되고 지역감정이나 흑백논리와 같은 단어들이 영원히 사라져 서로 신뢰하고 사랑할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온 국민이 안정된 사회환경 속에 안심하면서 자부심을 가지고 활기찬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오늘의 난국을 타개하고 위대한 국가로의 전진을 위한 시급한 당면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국민 여러분. 역사의 단절이 아니라 지속적 발전을 바라는 여러분의 기대를 등에 업고 역사와 국민을 두려워하는 겸허한 마음으로 오늘 저는 이 시간을 감히 갖는 바입니다. 저는 우국충정에서 나온 이 구상이 대통령 각하와 민정당 전 당원은 물론이고 국민 모두의 성원으로 뽑힐 수 있게 되리라 확신합니다. 저의 이 기본 구상이 받아들여질 경우에는 앞으로는 이에 따른 세부 추가사항들이 추진될 것입니다. 만에 일이라도 위의 제안이 관철되지 아니할 경우 저는 민정당 대통령 후보와 당 대표위원직을 포함한 모든 공직에서 사퇴할 것임을 아울러 분명히 밝혀두는 바입니다.

국민 여러분. 대통령 단임제의 실천으로 이 나라 헌정사에 민주주의의 깊은 뿌리를 심기 시작했고 물가 안정과 국제경쟁력 강화로 흑자경제를 이룩하여 국가 안보역량을 대폭 강화하면서 올림픽을 유치하는 등 우리 제5공화국 정부의 빛나는 업적이 결코 과소평가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오늘 우리는 어떠한 상황 하에서도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수호와 발전을 포기할 수는 없으며 평화적 정부이양의 화합은 우리가 행하여야 할 눈앞의 크나큰 과제입니다. 또한 올림픽이 얼마 남지 아니한 현 시점에서 국론이 분열되어 국제사회의 비웃음을 당하는 국가적 수치를 방지할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신성한 한 표를 행사할 권리를 간직한 채, 청년은 이상을 향하여 실력을 배양하고, 근로자 농민은 안심하고 일하며, 기업가는 창의적 노력을 더하고, 정치인은 대화와 타협의 노력을 기울여 미래를 설계하는 사회를 이룩해 나갑시다. 법과 질서가 준수되면서 생동하고 발전하는 진정한 민주사회를 위하여 저도 최선의 노력을 경주할 것을 다짐합니다. 우리나라는 우리 모두의 나라입니다. 조상과 선열의 뜨거운 피로 세워지고 다져진 이 나라를 땀과 지혜로 훌륭히 가꾸어 우리 후대에게 자랑스럽게 물려줄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우리의 시대적인 책무입니다. 한민족의 역사는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발전한다는 것을 세계만방에 알려주어 세계사에 공헌할 수 있도록 국민적 슬기를 한데 모아주실 것을 바라마지 않습니다.

국민 여러분. 그리고 당원 동지 여러분과 야당 정치인 여러분. 저의 충정이 받아들여져 오늘의 난국이 극복되고 모든 국민 개개인이 안정되고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위대한 나라를 열어가는 전환점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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