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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연습

feat 진정한 깨달음

by Emile

진정한 깨닫음은 죽기 직전에 이르러서야 겨우 눈뜰까 말까 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죽기 직전까지는 어떠한 변화나 반성, 후회를 기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언제 죽을지 그때는 완벽한 비밀이기 때문에 내일 당장 죽을 것 같은 상황에 이르더라도, 오늘은 전혀 깨닫음에 다가서지 못한 채, 결국 여전히 깨닫지 못한 마지막 날을 맞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깨닫음을 위해서는 연습이 필요하다. 즉 죽음의 연습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내일 곧 죽을 것을 가정하고 오늘 행동한다면 변화나 반성, 후회를 그나마 얻어 낼 수 있고 이것은 깨닫음의 원천이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마저도 오늘 당장이 아니라 내일이라는 미루기와, 실제로 닥친 것이 아닌 어디까지나 가정적 상황이라는 한계가 항상 존재한다. 마치 예비군이나, 민방위 훈련에서 이것은 실제 상황이 아니며, 그래서 전혀 죽음을 가정하지 않은 채 대충 죽음의 연습을 하고 있는 우리 자신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깨닫음을 위해서는 실제 상황처럼 죽음의 순간을 진지하게 연습해야 한다. 죽음으로 달라지는 것은 무엇인가? 흔히 죽음을 통해 영혼이 이탈하여 몸을 잃는다고 생각하지만 몸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진정 잃는 것은 손을 통해 꽉 쥐고 있었던 무엇을 잃는 것이니까. 손의 힘이 점점 빠져나가고 손에 쥔 것은 스르르 빠져나간다. 그 과정을 통해 비로소 깨닫는 것은 지금 손에 꽉 쥐고 있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 과정에서 멀어지는 또는 가까워지는 관계나, 기억처럼 손에 쥘 수 없는 것만 결국 남게 된다는 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묘비명에는 각인되는 것은 특별히 그것이 손에 쥐고 있던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묘비명에는 남긴 재산이 얼마였다고 결코 숫자로 보여주지 않으며, 사실 과거 대단한 권력을 누렸다는 것도 전혀 대단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운이 좋다면 그나마 죽음의 마지막 순간에 깨달은 어떤 문구가 각인될 수 있을 것이다. 묘비에 어떠한 문구를 새겨 넣기를 원하는가? 요즘은 묘비도 잘 새기지 않지만, 많은 글자를 남겨놓을 수는 없다. 죽은 자에게 하락된 문구는 X(구 트위터)의 글자수 제한처럼 겨우 140자, 늘어나사 280자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차라리 지금 당장 남기고 싶은 짧은 시를 찾기를 추천한다.


문자에서 사진으로, 그리고 영상으로 진화한 시대지만 아직까지 단적으로 그 삶을 나타내 줄 수 있는 마지막 깨닫음의 매개체는 '단어' 또는 짧은 '문구'이다. 사진이나 영상은 인스타나 유튜브 만큼이나 아직 그 의미로 담기에는 살아 있음에 가깝지 죽음에는 거리가 있다. 그러므로 평생 꽉 움켜쥐었던 손의 힘이 풀리는 순간. 그 손에는 결국 문자, 짧은 문구 하나 남길 수 있는 쪽지가 전달되어 묘비에 각인되어 남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죽음의 연습은 자주 손에 쥔 것을 여기저기 풀어 묘비에 세길 문구를 찾는 길고도 짧은 작업임을 기억해야 한다. 삶의 연습이 가장 훌륭하고 멋진, 근사한, 기억하고픈 장소와 경험, 그리고 먹고 마실 것을 찾아 나서기 위해 손을 꽉 쥐었다 펴는 것이라면, 죽음의 연습은 가장 훌륭하고 멋진, 근사한, 기억되고픈 자신에 대한 함축된 문구 하나를 찾아 나서기 위해 손을 스르르 풀어놓거나 손을 마주 잡는 일이 될 것이다.


당장 죽지는 않지만 사람은 당장 이유 없이 자주 아프곤 한다. 단기 죽음의 연습이라 부를 수 있는 이러한 사건은 보다 깨닫음에 가까이 접근하는 순간일 수 있다. 물론 아픈 것에서 회복됨과 함께 깨닫음도 곧 사라지겠지만 만약 지금 어딘가 아프다면, 기억하고 싶은 좋은 문구를 찾거나, 손을 풀어 가진 것을 놓고 다른 손을 마주 잡는 기회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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