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짝직기 > 업신여김 > 동경 그리고 결핍
나는 알고 있다
네가 어제 자랑질한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네가 어제 자랑질한 것을.
자랑이란 무엇인가?'자랑이란 자기 자신 또는 자기와 관계있는 사람이나 물건, 일 따위가 썩 훌륭하거나 남에게 칭찬을 받을 만한 것임을 드러내어 말하는 것. 또는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리'를 뜻한다고 한다.
짝직기
그러나 인간이 자랑을 하게 된 동기와 이유는 명확치는 않다. 다만 동물의 행동에서 추정해 볼 경우 짝짓기를 위하여 자랑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새들이 더 멋진 깃털을 자랑하며 구애하는 장면을 보면, 인간도 마찬가지로 구애와 짝직기의 과정 중에 자랑질이 시작되었으며, 인간의 유전자 깊숙이 자리 잡았음이 추정된다.
계급의 형성은 자랑을 더욱더 부추긴 것으로 보인다. 단순히 좋은 짝을 찾는 것 이상의 경쟁사회는 자랑을 통해서 상대보다 보다 더 높은 계단의 층계에 있음을 굳이 증명하려 한다. 이때부터 자랑의 순수성은 훼손되기 시작했다. 짝직기의 욕망을 넘어서 자랑거리를 통해 남을 업신여기기 위한 불순한 의도가 가미되었기 때문이다. 칭찬과 비난의 경계선에 서서 자랑은 위험한 줄타기를 하며 자기 자신은 띄우고 상대방은 가라앉혀 기분 나쁘게 했다.
업신여김
그래서 자랑의 이유는 칭찬받으려는 욕구보다 이제 업신여김을 받지 않으려는 욕망이 더욱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자랑에는 칭찬받을 것 이상의 과대포장을 필연적으로 수반하기 마련이다. 실제보다 좀 더 멋져보여야 하고 실제 갖은것 보다 더 많아 보여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그렇게 보이지 않는 자들을 깔아뭉개고 싶어 한다. 실제 노력한 것보다 자랑을 통한 불노소득적 결과를 기대한다.
동경
인스타그램과 같은 소셜미디어는 일찌감치 자랑의 욕망을 간파하고 자랑의 시대를 활짝 열었다. 자랑은 짝직기에서 시작해 업신여김을 넘어서 마침내 자랑질을 일삼는 객체에 대해 동경의 양상을 나타낸다. 이제 업신여겨지는 자기자신의 주체를 망각하고 자랑질하는 객채에 동화되길 갈구한다. 자랑질은 그렇게 발아래 놓여 객체와 동일화되는 듯한 잘못된 희열을 느끼는 추종자들을 바탕으로 더욱 우상화된다.
자랑의 객체가 요원할 경우 가장 비슷한 객체인 자식을 통하여 자랑을 일삼는 것은 아주 전통적인 자랑의 행태였다. 자식자랑을 팔불출의 행동양식으로 여겼던 친구들도 드디어 자식자랑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축하할 일도 있긴 하지만 자기 자신의 발전이 다 했음을 시인하고 자식에게 그 기대를 넘겨주는 듯한 자랑은 한편으로는 짠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자식은 엄연히 나와 다른 객체로서 자랑의 주체가 될 수 없음을 상기해야 한다. 그보다는 자신이 자식들에게 자랑스러운 부모인지를, 혹 부끄럽게 늙어가고 있지 않은지를, 자식 자랑에 앞서 먼저 살필 필요가 있다.
글을 쓰는 이유도 자랑에 상당한 목적이 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달리기를 잘하면 운동장에서 뛰고 싶고 노래를 잘하면 한곡 뽑고 싶듯이 글쓰기를 잘하면 책 한 권 쓰고 싶지 않겠나? 하지만 현대의 의미에서의 자랑은 글쓰기 같은 주체적 본질보다는 좋아요와 구독자 같은 객체적 숫자로 자랑이 표출된다. 구독자 몇만의 유튜버나 틱톡커라고 자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글을 잘 쓰고 말고를 떠나 이 글이 얼마나 많은 좋아요와 조회수를 받고, 역시 얼마나 많은 구독자를 가지고 있느냐의 자랑이 앞선다.
그러나 이 모든 숫자는 역시 객체적 숫자일 뿐이다. 대통령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신을 찍었는지 권력의 자랑에 취해 그 투표의 주체와 의사를 자주 망각한다. 목사는 신도 수의 자랑에 취해 자신을 신으로 착각한다. 유튜버도 자신이 몇만 구독자의 유튜버라고 자랑할 뿐 추종자는 돈벌이의 수단 그 이상이라도 아니라고 여기게 된다. 심지어 여기 작가도 몇 명의 구독자와 몇 회의 조회수에 흥분하여 자신이 글을 잘 쓴다고 착각하여 자랑을 일삼고, 조언도 하며, 얼마를 벌었다고 유혹할 뿐, 정작 그 주체가 되는 글은 본질은 초라하고 빈약하기 짝이 없는 경우가 많다.
결핍
자랑은 짝직기에서 시작하여 업신여김을 거쳐 자랑의 객체에 대한 동경에 이른다고 앞서 말하였다. 그 자랑의 본성에는 공통적으로 결핍이라는 원리가 숨어있다. 짝직기가 본초적 성의 결핍이라면 업신여김과 동경은 후천적으로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결핍이다. 결핍이 없으면 자랑하지 않는다. 즉 자랑할 필요가 없으면 자랑을 하지 않는다.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말 그대로 모든 것이 월등하고 풍족하여 굳이 내세울 필요가 없으면 자랑도 필요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결핍은 그것이 잠재된 어릴 적 욕망의 표출이든, 벼락부자의 과거의 자기 자신의 모습에 대한 업신여김이든, 책은 읽기 싫은데 글은 잘 쓰고 싶은 지적 불가능의 보상이든, 모든 자랑은 결핍이라는 공통 요소를 포함한다.
그러므로 칭찬받아 마땅한 자랑도 있지만 과도한 자랑질은 좀 작작하길 바란다. 자랑질은 마치 업신여김을 받지 않기 위한 몸부림으로, 주체가 아니면서도 객체를 끌어당겨와 자기 것으로 보이게 하는 눈속임으로, 그리고 결핍을 스스로 들어내고 있는 속이 훤히 보이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자랑하고 싶어 진다면 먼저 결핍부터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분명 어딘가 아픈 상태일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