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만 달라?
#조용한 가족이 수다스러워지는 법
오늘은 가족들의 3차 상담이 있는 날이다, 대학로 연구실에 가족들과 김교수가 둘러 앉아
있다. 모두가 참여하는 집단상담을 진행하고 있다.
이제야 모두 앉아 이야기 할 분위가 됐나 보다. 지금까지는 엄마 아빠 개별상담 그리고
부부 상담, 병구 청소년 상담 이렇게 진행을 해왔다. 처음으로 모두 참여하는 집단 상담이
이루어진다.
지난 한달 간 있었던 일을 평가하고, 행동변화에 대한 상담을 할 것이다.
김교수가 예를 들어서 자세하게 설명을 한다. 이해 할 수 있도록.
대화가 없는 조용한 가족이 있다. 자녀 모두가 모범생이고 남편은 직장에서 인정받는
사람이고 아내는 집안일도 잘하는 현모양처다. 누가 봐도 부족할 것이 없는 가족 구성원이다.
가족 각자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런데 이 가족들은 서로 말수가 없다,
이 가족이 수다스러운 가족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질문의 답은 ‘가족 간에 같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경험이 자연스럽게 대화를 하는 밑천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가족들 모두 끄덕끄덕 공감을 하고 있다.
며칠 전 경험했던 집안청소, 가족회의, 미술치료 모두가 작지만 소중한 경험들
이었다.
이번에는 지난 상담에서 약속했던 ‘실천해야 할 과제’를 조심스럽게 물어본다.
엄마는 아빠에게 지시적으로 말하지 않기, 아빠는 부드럽게 말하기, 병구는 잘못 했을 때
‘죄송합니다’ 인정하기였다. 각자 조금이라도 달라졌다고 생각할까?
김교수 어때요 우리가 약속한 과제가 많이 이루어 졌나요?
병구 많이 된 것 같아요, 제가 좀 늦어도 이해하는 것 같고...
병구가 선뜻 대답한다. 김교수는 ‘이해 주니 더 열심히 해보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이번에는 김교수가 아빠에게 물어본다
김교수 요새는 양말 아무데나 벗어놓고 그렇지 않아요?
남편 그렇죠
김교수 그럴 때는 어떻게 하세요?
남편 병구야 치워야지, 그러면 네~ 하고 나와서 치우더라고요.
김교수 그래요? 좋으시겠네요?
남편 노력하는 모습이 보이니까요.
아빠는 조금이라도 변한 병구를 쳐다보며 흐뭇해 한다, 이전 같으면 열댓 번을 얘기해도
‘네’하는 대답뿐이었다. 아빠가 ‘이 새끼야’하는 쌍소리가 나오면, 그제 서야 방에서 나오는
병구가 이젠 달라진 것이다. 김교수가 병구에게 물어본다.
김교수 우리 병구에게 한번 물어 볼게, 병구는 학교 갈 때 슬리퍼 신고 다니고
가방 안 들고 다니고 양말도 아무렇게나 벗어놓고 왜 그렇게 했지?
병구 그냥 까먹는 거 같아요. 양말은 요즘 안 그런 것 같은데..
김교수 어떻게 해서 그렇게 달라지게 됐어?
병구 그냥 기억에 남아서...
김교수 그 전에는 기억에 안 남았는데 기억이 남게 된 건 뭐가 달라져서 그런 걸까?
선생님이 설명해 줄게. 이 프로그램 시작하기 전 하고 지금 하고 아빠가 얼마나 더 좋아?
조금 더 좋지?
병구 좀 많이요
병구 사람이 좋아지면 그 사람의 말이 기억에 남거든...니가 양말을 벗어놓지
말라는 게 기억이 남는 거는 그 말을 한 사람이 좋아지기 때문이야.
병구는 이해 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사람이 좋아지면 그 사람이 한 말이 기억이 난다.
김피디는 지난 상담에서 ‘담배에 대하여 병구가 했던 상담 내용’이 생각났다.
담배문제로 아빠와 수 없이 싸워도 담배를 끊지 않았던 병구. 하지만 병구는 여자 친구의
말에 단박에 담배 끊기를 결심했다.
왜 일까? 여자 친구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잘 보이고 싶고,
그 사람이 하는 말이 기억나고, 행동으로 보여주게 된다.
나를 좋아 하게 만드는 것이, 상대방을 변화시키는 좋은 방법이라는 뜻이었다.
엄마와 아빠도 고개를 끄덕인다. 이번에는 아빠에게 물어 본다
김교수 아빠는 병구가 조금 더 좋아지신 거예요?
남편 네~ 조금씩, 이제 마음이 조금 놓이는 것 같아요. 마음이 열린다고 할까..
김교수 어떤 점이 좋아 보이죠?
남편 그러니까, 뭘 시키면 할라고 하는 모습이 보이니까
서로 조금 씩 다가가는 모습이 보인다, 조금씩 가까워지니까 상대방의 말이 귀에 들어오고
상대방이 원하는 게 뭔지 보인다.
그러면 아빠를 더 좋아지게 하려면 병구가 원하는 게 뭘까?
김교수 혹시 너 아빠를 아빠라고 부르니?
병구 네
김교수 언제부터 불렀어?
병구 4학년 때요
김교수 처음에 이 집에 왔을 때부터?
병구 네
병구는 처음 이집에 올 때부터 아빠라고 불렀다, 그런데 아빠는 병구를 아들이라고 부른 적이 있었을까?
김교수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 문제는 뒤에 다룰게요’라고 돌리며 엄마에게 질문을 한다
# 엄마는 왜 성질 급한 사람이 됐을까?
엄마는 일에 대해 조급증이 있다. 일이 빨리 처리되고 결과가 빨리 나와야 된다는 강박관념이
있다. 아들을 바라보는 시선도 아빠를 대하는 태도도 늘 결론을 말하고 “해”라고 말하는 식이다.
빨리빨리 판단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말하면 바로 행동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엄마이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남편의 태도가
늘 불만 이었다. ‘달라! 나하고 너무 달라‘ ’나랑 안 맞아‘라고 엄마는 습관처럼 말한다.
엄마의 조급증은 어디서부터 생긴 걸까?
김교수가 엄마에게 욕심 때문이라고 얘기한다.
김교수 욕심이예요, 욕심이 다른 사람을 상처 줄 수 있어요.
왜 그렇게 조바심을 느끼세요?
아내 이 문제뿐만이 아니라 성격이 엄청 급해요
김교수 참을성도 없으시고?
아내 네, 일이 잘 되지 않으면 괜히 불안하고, 일 끝나는 거를 딱 봐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성향이 있는 것 같아요
김교수는 아빠와 병구를 번갈아 바라보며 얘기한다
김교수 느린 사람보고 빨리 하라고 하는 거잖아요 똑같아요. 평범한 학생이 되라는
소박한 소망이 왜 병구한테 상처가 됩니까? 지시적으로 얘기하는 것이
남편에게 왜 상처가 됩니까? 아빠나 병구는 느린 사람이거든요
엄마는 남편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아내 내가 당신한테 그게 그렇게 상처가 되는 말인지 몰랐어, 근데 내가 좀
빠르다는 생각은 하고 있어, 당신도 나랑 같다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내가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당신이 알아서 빨리 하겠지’라고 생각했지.
지금 상담하면서 ‘내가 너무 강요를 했구나’하는 생각을 하니 되게 미안하네
남편이 멋쩍게 한마디 한다.
남편 내가 그렇게 느린지 몰랐네요 하하~
서로 고치면 되지 뭐
사람들은 모두 성향이 다르다. 빨리빨리 결정하고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신중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늘 우리는 자신의 잣대로 타인을
평가해 왔다. 병구나 남편은 느린 사람이다,
엄마는 행동을 바로 하지 않는 두 남자에게 늘 불만이었다. 아빠나 병구는 엄마가
명령조로 말하는 것이 기분 나빴다. 지시받고 무시당하는 기분이었다.
그것은 1차 상담에서도 아빠의 불만으로 표출되었다.
그러면 엄마는 이런 조급증이 왜 생겼을까?
김교수 왜 그런 강박관념이 생겼다고 보세요?
아내 글쎄요? 어렸을 때부터 그랬던 거 같아요. 그리고 결혼하고 대식구들과 살면서,
그때는 11명의 식구가 같이 살았으니까, 미리미리 준비해 놓지 않으면 안 되거든요.
빨리빨리 결정하고 준비하고 빨리하고 쉬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김교수 왜 그렇게 급하세요, 언제부터?
아내 어렸을 때부터 인 것 같아요.
엄마는 초등학교 때 새엄마와 살던 기억을 떠올렸다. 아버지가 병이 나서 엄마도 어린나이에
부업을 해야만 했다
"어렸을 때 저희가 부업을 했어요 인형에 소리 나는 삐삐장치를 넣는 일이었는데, 그때가 3학년 때인가
4학년 때였어요, 그때 새엄마랑 집에서 일을 했는데, 새엄마는 어른이고 저는 어린애잖아요,
새엄마가 넘겨주면 제가 처리를 해야 하는데 인형이 자꾸 쌓여가는 거예요, 그러면 ‘꽤 부리는 년’이라고
새엄마가 고함을 쳐요. 저는 그게 너무 무서워서 빨리 해치워야 된다는 생각이 앞섰지만
자꾸 인형이 쌓여가는 거예요. 그 때는 그게 정말 싫었어요. 그 후로 그런 강박관념이 생긴 것 같아요."
어린 아이가 감당하기에는 힘든 상황이었다.
일이 끝나면 버려진 인형을 갖다가 밤새 연습하곤 했다. 빨리빨리 해야 해..
그 후에 이웃 아줌마들이 칭찬을 해 주었다, '어뭐! 재봐, 재는 진짜 손이 빨라!'그 소리에 위안을 느끼며
초등학교를 마쳤다. 엄마의 조급증이 시작된 것도 그때였다.
김교수는 조급증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했다
“내 욕심! 내가 빨리 빨리 해서 해치우고자 하는 욕심이 ‘가족이 달라지는 것을
막고 있는 이유‘ 중에 하나라고 보시면 되요 “
앞으로 느긋하게 기다려 줘야 하는 것이 엄마의 할 일 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마음을 내려놓고 이제는 가족들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라’는 김교수의 조언에
엄마는 고개를 끄덕인다.
김교수
“오늘 상담은 약간의 분위기 전환을 마련하는 상담이었어요 그동안 각자의 입장만
고수하면서 다른 사람이 달라지기만을 바라고 나한테 뭐가 문제인지 몰랐어요
그리고 상대방에게 어떻게 상처를 주고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을 못했잖아요
그래서 오늘은 타인의 입장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끔 기회를 마련하고 질문을 던져봤죠.
아내의 경우에 본인의 ‘조바심이 어디서 왔는지’ 알아보는 통찰의 시간을 가졌잖아요.
깨닫고 이해하는 통찰이 생기면 변화가 있거든요.
다행스럽게도 아내의 경우도 자기가 남편한테 어떻게 상처를 주었나 그리고 아버지의 경우
자녀한테 어떻게 상처를 주는지에 대해서 조금씩은 인식이 생기는 것 같아요. 그 점은 다행이에요."
# 아무도 해 주지 않는 이야기
모두가 상담실을 나가고 병구와 김교수 둘이 마주보고 있다.
시작은 가벼운 주제로 먼저 말을 꺼내는 김교수.
김교수 병구의 꿈에 대해서 이야기 해줄래?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다든가?
병구 그냥...좋은 여자 만나서 좋은 집에 살고, 돈 걱정도 없이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내 아이도 낳고..
병구가 말하는 ‘내 아이’는 무슨 의미 일까? 김교수가 그 말을 놓치지 않고 다시 물어본다.
김교수 지금 가족은 평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거지?
병구 네 평범하지 않아요
김교수 어떤 면에서 좀 구체적으로 말해 줄래?
병구 그러니까.. 저하고 아빠하고 동생하고 성도 다르고 엄마도
저를 일찍 낳고 그런 게 달라요 많이..
김교수 그러니까 병구 마음속에서 평범한 가족은 아빠 성을 가진 형도 있고
동생도 있고 이런 거네
병구 네
병구는 아빠와 자신이 성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말을 안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 문제에 대해서 아무도 얘기해 주지 않았다. 친 아빠가 아니면 꼭 성이 달라야 하는지
병구는 알 수 없었다.
엄마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엄마가 마음아파 할까봐, 그냥 물어보지 않기로 한 것이다.
김교수도 섣불리 얘기 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김교수 병구가 성이 다르잖아 그거에 대해서는 어떤 느낌이야?
병구 그냥 어렵 네요
김교수 어렵지? 그거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 있어?
병구 네.
병구에게는 정말 어려운 질문이었다. 그리고 어려운 현실 이었다.
하지만 김교수는 병구의 생각을 알아야 했다.
이 문제를 푸는 것이 가족들에 대한 마지막 과제라고 생각했다.
김교수 어떤 생각해 봤어?
병구 그냥...가족 같지 않다는 것, 그냥 저 혼자 인 것 같아요
김교수 그렇구나 그냥 내가 성이 혼자 다른 거에 대해서만 생각했구나
그리고 왠지 나는 이 집의 가족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구나1
병구는 이름 앞에 성이 다르다는 것을 중학생이 되어서야 알았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알았다. 그리고 함께 살고 있지만 가족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무도 얘기해 주지도 않고, 물어 볼 수도 없는, 이 문제가 병구의 마음속에 감춰진 응어리가 되었다.
병구는 ‘있는 듯 없는 듯 살고 싶다’고 했다. 그 때부터 병구는 이 집에서 타인으로 5년을 살았다
병구의 축 처진 어깨를 쳐다보는 김피디. ‘예상은 했지만 병구의 상처가 너무 깊다‘는 생각이 든다.
이 상처는 아무는 상처가 아닌데. 평생을 묻고 살아가야 하는 상처인데.
16살 병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든 상처다.
김피디는 미술치료를 위해 집을 방문한 김선생님의 인터뷰가 생각났다.
“가족 구성원이 되지 못한다면, 3년 후 병구가 독립하는 것이 낫다“
김피디는 그것도 하나의 방법 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아들’은 되지 못하는 것 아닌가..?
병구는 5년 동안 어떻게 버텨 왔을까?
병구는 남들이 갖고 있지 않은 장점이 있다. 지금 좋으면 이전의 나쁜 기억들을 잊어
버린다. 이런 것은 태어나면서 가진 성격일까? 아니면 생존을 위한 무의식 적인 행동일까?
병구가 말을 이어 나간다
병구 그냥 지금 이 순간 만 좋으면 저는 까먹어요 단순해요. 그게 장점
인거 같아요, 그냥 지금만 좋으면 된다고 생각해요.
전 그래서 어렸을 때 기억을 잘 안 해요
김교수 그냥 덮기로 한 거지?
병구 네
병구는 어렸을 때 엄마가 곁에 없어서 외로 웠다. 그리고 초등학교 5학년 때 이집에 와서
가족이 되지 못해서 외로웠다. 그렇게 16년을 외롭게 살았다.
병구 밤까지 노는 것도 괜찮아요. 어렸을 때 외로움을 그렇게 밖에서 풀어서
그런가 봐요. 그래서 지금도 밖에서 친구들과 놀면 마음이 편해요.
거기는 외롭지 않잖아요.
지금까지 병구가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는 것은 ‘집에서 할 게 없어서’라고 생각했다.
엄마나 아빠나 김피디 까지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외롭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자!
나를 외롭게 하는 사람이 있고, 외로움을 풀어주는 사람은 따로 있다. 이것은 근본적인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그냥 덮어 두고 있는 것이었다. 잠시 잊고 지내는 것이다.
나를 외롭게 하는 사람은 아빠다. 아빠가 병구의 문제를 풀어주지 않으면 병구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가족이라는 인연은 끊어지지 않지만, 친구는 머물다 떠날 수 있는 것이다,
그 때 병구는 또 다른 누군가를 찾아 나서야 하지 않을까. 외로움을 달래 줄 사람을..
김피디는 생각했다.
가족의 테두리로 병구를 들어오게 해야 한다. 그것이 이 가족에게 남은 마지막
숙제일 것이다.
마지막 숙제를 풀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