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돌에 칼을 갈던 아버지
말이 없던 아버지가 탁한 이웃과의 소통 방식이었을지도
저녁밥을 차리려고 김치통에서 잘 익은 포기김치 하나를 꺼내 도마에 올려놓았다. 적당한 크기로 썰려고 하는데 칼이 말썽이다. 며칠 전부터 대파와 양파를 써는데도 잘 썰어지지 않더니 오늘은 김치도 깔끔하게 가르지 못한다. 난 칼질할 때 슥슥 잘 잘리는 느낌이 좋다. 무나 당근을 썰때 원하는 크기로 날렵하게 잘 썰어지는 칼날의 날카로움을 즐기는 편이다. 칼날이 무뎌지면 음식 하는 재미가 없다. 요리를 못하는 사람이 연장 탓을 한다는 옛말이 맞다.
칼갈이를 싱크대 서랍에서 꺼냈다. 붉은색 플라스틱에 스테인리스가 엇갈리게 맞물려 있는 오래된 칼갈이다. 어머님이 쓰던 거를 지금껏 쓰고 있으니 최소한 나이가 25살이다. 그래서인지 언제부턴가 칼이 날카롭게 갈리지 않는다. 맞물려 있는 스텐 사이에 칼을 넣고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해도 칼날의 연마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마 오래 사용해 이물질도 끼어있고, 닳아서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 같다.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다. 친정아버지의 칼을 가는 솜씨는 동네에서 유명했다. 동네의 궂은일을 찾아서 하는 일꾼이었는데 특히나 칼을 잘 갈았다. 어릴 때 마루에서 책이나 TV를 보고 있으면 동네 아줌마가 "윤희 아버지 있어요?" 하는 소리가 들려 나가 보면 칼을 들고 있을 때가 많았다. 그러면 아버지는 방에 누워있다가도 뛰어 나가 숫돌을 꺼내 들었다. 칼을 가는 일은 마당 한쪽의 수돗가에 아빠가 자릴 잡고 앉았을 때부터 이루어진다.
큰 의식 인양 양 팔을 걷어 올리고 아빠는 꺼내온 숫돌 위에 칼을 올린다. 회색빛이 도는 숫돌은 얼마나 사용했는지 가운데 부분이 조금 파여있었지만 아빠의 칼 가는 솜씨에는 지장을 주지 않았다. 숫돌에 물을 묻히고 동네 아줌마에게 받아 든 칼을 갈기 시작했다. 슥슥 삭삭 소리는 내며 칼이 움직인다. 한 손은 칼의 손잡이를 잡고, 나머지 한 손은 칼날의 아랫부분에 놓았다. 아니 살짝 칼날에 대고 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한 손으로 오르락내리락하고 힘 조절을 한다면 나머지 손은 살짝 거드는 정도였다.
칼날을 갈면서 가끔 바가지에 있는 물을 끼얹을 때도 있다. 수십 차례 칼날은 숫돌 위에서 움직이며 사르륵사르륵 소릴 내고, 아빠는 가끔 하늘 쪽을 향해 칼날의 날카로움을 확인했다. 손가락을 칼날에 대어 보고,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칼은 다시 숫돌 위로 돌아갔다. 몇 번의 물 끼얹음과 확인 작업이 끝난 후에야 칼은 날렵한 최상의 상태로 주인에게 건네 졌다. 오랫동안 아빠는 숭고한 소명의식이 주어진 것처럼 동네의 칼갈이를 자처했다.
내가 사춘기 무렵일 때, 아빠는 잘 다니던 회사의 월급쟁이를 그만두고 야심 차게 사업을 시작했지만 잘 되지 않아 집에 있었다. 그때도 아빠는 동네의 칼 가는 일을 멈추지 않았고 나는 그게 불만이었다. 엄마는 돈을 꾸러 다니는 데도 아빠는 칼갈이를 멈추지 않으니 미웠다. 무능해 보였다. 수돗가에서 들려오는 슥슥 삭삭 칼을 가는 소리가 싫어서, 라디오 소리를 크게 틀었다.
그날은 아버지가 오랜만에 새로운 직장으로 일을 하러 다닌 지 3일째 되는 날이었다. 그동안 사업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시고 멈춰버린 기계만 바라보다가 전자회사에 취직을 했다. 학교에 다녀오니 엄마가 부엌에서 음식을 하고 있었다. 아빠가 출근하는 직장에서 무거운 자재를 나르다가 허릴 삐끗했다고 커다란 사각형의 파스를 몇 군데나 붙이고 갔다며 엄마의 얼굴엔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그날의 저녁 메뉴는 아빠가 좋아하는 김치찌개였다. 잘 익은 김치를 도마 위에 올리고 적당한 크기로 김치를 썰었다.
"니 아버지가 출근하기 전에 칼을 갈아 놓고 갔다."
엄마는 말했다. 아빠가 오랜만에 출근하는 모습도 좋고, 자신을 위해서 칼을 갈고 갔다는 사실에 뿌듯해하는 표정이었다. 살코기보다 비계가 더 많은 돼지고기를 뚝뚝 썰면서도 "칼이 참 잘 든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오랜만에 듬직한 가장의 모습을 보여주는 남편에 대한 애정이 담겨있었다.
하지만 그날 아빠는 그 돼지고기 잔뜩 들어간 김치찌개를 떠먹으며 "더 이상 회사에 그만 나가겠다고 말했어."라고 선언을 했다. 허리와 다리가 원래 약했는데 하루 종일 무거운 자재를 들고 다니는 게 힘에 부친다고 했다. 엄마는 고개를 들지 않고 "알았어요."라고 말했다. 난 그날 김치찌개를 한 숟가락도 먹지 않는 걸로 아빠에 대한 원망의 감정을 나타냈다. 그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날 이후 아빠는 다시 미련이 남은 사업을 구상했고, 대신 엄마가 식당에 나가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그 후에 아빠가 칼을 갈아 주는 일을 계속했는지 기억에 없다. 내가 사춘기를 겪느라 집에 늦게 들어오기도 했으니 못 본 것인지, 아니면 아빠가 칼을 갈아 주는 일을 그때쯤 멈추었는지 모르겠다. 오늘은 아빠가 칼을 갈던 모습이 유난히 생각이 난다. 늘 동네 사람들 칼을 모아서 수돗가에 앉아 한참 동안 칼을 가느라 일어나지 않았던 뒷모습도 기억이 난다. 어쩜 그건 말이 없던 아버지가 택한 이웃과의 소통의 방식이었을 것이다. 동네 어른들의 안부와 좋은 일, 어려운 일을 들으며 기뻐하고 위로를 나누던 의식이었던 것 같다. 그때는 우리만 잘 살면 되지 라고 투덜댔는데 이제는 슥슥 삭삭 아빠의 칼 가는 소리가 못 견디게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