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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병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

by 하루한끼

잠이 안 오던 날들이 있었다.

수면제를 먹어도 반수면상태로 지속되었다.


어느 날 소주 반 병을 마셨는데

기분이 살짝 좋아지면서 잠이 잘 왔다.


그래서 한동안 매일 소주를 마셨다.

아이들에게 보이기 싫어

머그잔에 소주 반 병을 따라 조금씩 마셨다.

양도 조금씩 늘려갔다.


두 달쯤 지났을까?

술에 의존하다 결국 모든 걸로부터 도망치면 어쩌나?


어느 날 결심을 하고 단번에 끊었다.



그다음은 잠에 취했다.

틈만 나면 잠을 잤다.


잠을 자는 동안은 모든 걸 잊어버릴 수 있었다.

가끔 행복한 꿈을 꾸는 날에는

눈을 뜨기가 싫어질 정도였다.


밤이 깊을수록 감정이 풍부해져서

일부러 일찍 잠을 자기 시작했다.


덕분에 새벽에 눈을 뜬다.


온 에너지가 새벽에 충만해있어

일찍부터 씩씩하고 바쁘게 움직인다.






어느 날부터 나는 괜찮아 병이 생겼다.


일이 많아도 괜찮다.


본인 힘든 것만 늘어놓는 사람이 있어도

본인이 힘들면 다른 사람은 안보이겠지.

그럴 수 있지 괜찮다.


나이 들어 입사해서

불편하고 소외되는 상황을 겪을 때도

이미 각오한 일이니 괜찮다.


아들이 반항하고 못된 말을 할 때도

이러다 말겠지.. 괜찮다.


고3 딸이 공부를 안 하고 뒹굴거려도

알아서 하겠지 괜찮다.


야근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퇴근했는데

집안일이 산더미로 남아있어

곱절로 피곤해져도

내일 하자.. 괜찮다.


모임에서 나를 측은하게 쳐다보는

누군가의 눈빛에..

그래.. 동정이든 연민이든

그 마음만 생각하자. 괜찮다.


다 괜찮다...

그래야 산다.



그렇게 괜찮다며

하루를 보낸 날,

자기 전에 그 가면을 벗는다.


휴. 오늘도 무사히 보냈구나.



가면을 벗고 나면

사실 괜찮지 않다.


나도 아프고 힘들다.

걱정되고 두렵다.

지독하게 외롭다.


누가 대신 짊어질 수 있는 삶이 아니다.

오로지 나 혼자 견뎌야 하는 것들이다.


괜찮아 병은

무너지지 않기 위한 발버둥이다.


괜찮다 괜찮다 하다 보면

언젠가 정말 괜찮아지지 않을까?



오늘 내가 성실히 보낸 하루 덕분에

짊어진 무거운 짐의 1/10000이 가벼워졌으리라

위로를 하며 또 하루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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