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도시
근무지에 발령받고 버스에 처음 내렸을 때
연상되는 이미지였다.
이곳은 7~80년대 산업화의 중심지였다.
그 당시에는 일자리를 찾아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시장, 상가, 유흥가, 홍등가가 즐비했다고 한다.
환경오염도 심각했고 90년대 중반 이후
공장과 상가들이 많이 빠져나가면서 쇠퇴기를 맞아
빈 점포가 많이 보이는 잿빛 동네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직장 근처에 카페가 없어
직원들이 편의점 커피를 사 마셨다고 한다.
다행히 지금은 카페가 드문드문 생겼다.
가장 최근에 생긴 카페가 나의 단골집이다.
신규로 발령받아 낯설어 어색할 때
나 보다 더 늦게 입성한 그 카페가 친근하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사장님도 친절하고 가격도 무척 착하다.
근처 직원들이 많이 가는 카페는
원두가 다르다며 더 맛있다고 하는데
한번 마셔 보았지만 라테 맛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메리카노는 다르게 느껴졌지만..)
항상 사람이 많아 줄을 서야 하고
가격도 차이가 꽤 난다.
커피맛에 예민하지 않아서 다행이랄까?
그래도 저가형 프랜차이즈 카페보다는
단골집 라테가 진하고 고소하다.
단골집 가게 입구에는 민트색 경차가 항상 주차되어 있고
민트색 간판, 메뉴판이 눈에 띈다.
차량은 젊은 여사장님 것으로 보인다.
나 같은 짠순이는 커피값도 아끼는 편이라 잘 사 먹지 않는데
기분이 안 좋을 때, 유난히 지칠 때, 한기가 들 때
어느 날 갑자기 라테가 먹고 싶을 때는 가게 된다.
한 달에 한두 번 간 적도 있었는데
최근 들어 추워지기도 했고
마음도 울적, 기분도 별로라 이달에는 벌써 여러번 방문했다.
여사장님은 30대 초중반으로
항상 화이트계열의 블라우스와
브라운 계통의 원피스형 앞치마를 입고 단아하고 예쁘시다.
손놀림도 빨라서 하트무늬 카페라테가 금세 만들어진다.
오늘처럼 추운 날,
출근해서 출근복(카디건)을 걸치고
터벅터벅 걸어가 따뜻한 커피 한잔을 사들고 올 때
덩달아 마음도 따뜻해진다.
잠시 찰나의 행복이랄까?
라테 한잔 200칼로리가 넘고
유당증이 있는 편이라 안 좋은 걸 알면서도
그 순간의 행복을 위해 종종 가게 된다.
오늘은 갈지 말지 아직 잘 모르겠다.
습관처럼 매일 가다 보면
그 찰나의 행복도 시들해져버리지 않을까?
조금 더 힘든 날을 위하여
조금 더 속상한 때를 대비하여
조금 더 아픈 날을 위하여
행복을 아껴두는 마음으로 패스를 할 것인가?
오늘 아침에는 큰 아이랑 잠깐 실랑이를 했다.
수능을 앞두고 급식 먹는 것도 시간낭비라며 도시락을 싸달라고 했다.
도시락을 싸준지 일주일이 넘은 상황.
나름 요구사항도 많다.
도시락 메뉴도 물어봐야 하고 커피도 텀블러에 타달라고 하고
오늘 메뉴는 참치김밥
간식으로 귤 쿠키 두유 등도 챙겨줬다.
거기까진 계획의 일부라 괜찮았는데
갑자기 두터운 겨울 기모바지를 찾아달라고 한다.
엄마 아침 당직이라 30분 일찍 나가야 해서
1분도 허투루 쓸 수 없어.
필요한 거 있으면 바쁜 아침에 말고 전날 얘기해~
뾰루뚱한 채 등교한 딸을 뒤로 한채
나는 부리나케 출근준비를 하고 아들을 깨우기 시작했다.
무사히 버스에 오르고 나서야 한숨 돌린다.
날이 추워서 그랬을 텐데
주말에 점퍼랑 상의만 세탁해서 챙겨놓았는데..
하의를 깜빡했네..
저녁에는 아이들 겨울 웃을 모두 꺼내두어야지
이제야 딸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든다.
마음이 어수선하여
오늘 아침도 따뜻한 라테 한잔으로 시작해볼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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