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오만함이 부른 비극
쥐뿔도 없으면서 나는 오만했다.
산동네 시댁본가에서 바라본 풍경
구부 씨(=전남편)와 연애시절,
시댁에 인사드리러 갔다.
본가에는 시할머님과 숙부님 내외와 조카들이 살고 있었다.
산동네 중턱에 자리한 그 집은
푸세식 화장실, 스레트지붕, 좁고 약간의 냄새가 났지만
어린 시절부터 가난을 겪은 나는 그리 낯설지 않았다.
본가에서 구부 씨가 태어났다고 했다.
그래선지 푸근하게 느껴졌다.
거기다 대문 밖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경은
웬만한 관광지 못지않은 절경이었다.
결혼을 한 뒤로는
일 년에 세 번(명절과 제사 때) 본가를 방문했다.
큰 아이는 아가시절 한창 예민해서
본가에 가면 자주 울고 보챘다.
그런 아이를 업고 대문 밖을.오가며
저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본 기억이 선명하다.
시할머님도 돌아가시고
숙부님 댁도 떠나고
본가집은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나는 여전히 그곳이 그립다.
어떤 감정인지 굳이 정의 내리고 싶지 않다.
....
구부 씨와 나는 가난한 연인이었다.
정서적, 경제적으로나 지지자가 없었고
대학도 스스로 가야 했고
용돈 한 푼 쥐어주는 가족도 없었다.
나 같은 경우는 오히려 돌봐야 할 가족들이 있었다.
직장을 다녔어도
매달 생활비를 엄마에게 드리고
상여금이든 여윳돈은 무조건 적금을 넣는다고
지갑은 항상 여유가 없었다.
저녁을 건너뛰고 술 한잔을 하거나
버스를 타고 여행을 다니고
무료 영화관람 이벤트 쫓아다니며 데이트를 했다.
구부 씨는 방학 때마다 막일 알바를 해서 학비를 벌어야 했다.
그렇게 4년 넘는 시간 동안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만났다.
구부 씨를 만나면 마음이 안정이 되었다.
자신에 대한 믿음이 확고했고 매우 명석했다.
꼭 친남동생 같았다.
나에겐 남동생이 두 명 있는데
똑똑한 아이들이라 꿈을 펼치게 해주고 싶었고
조금이나마 도와주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가족의 테두리 안에 구부 씨를 포함시켰다.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였다.
구부 씨가 어떤 마인드를 가진 사람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나의 지원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내가 그러면 그런 거였다.
묵묵히 잘 따라준다고
나의 마음과 똑같다고 생각했고
구부 씨는 행복할 거라 마음대로 판단했다.
내가 무슨 능력자라도 된 양
쥐뿔도 없으면서 다른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나의 선택이 옳다고 믿었다.
결혼을 하고
사회적으로 위치가 올라가면서
구부 씨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지 깨달았던 모양이다.
형편이 나아져도
검소하게 사는 나를 보는 것이
답답해 미칠 것 같고 불행하다고 했다.
충격을 많이 받았었다.
사람은 생각이 다를 수 있다.
원하는 인생이 다를 수 있다.
내 생각이 다 옳을 순 없다.
상대방을 위한다고 하는 행동이
상대방에게 족쇄를 채우고
통제를 가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나 자신 하나도 다스리지 못하면서
타인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고 굳게 믿었던
나의 오만함이 부른 비극은
고스란히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젊은 시절에는 자신을 위해 살아보아야 했다.
자신을 아낄 줄도 모르고
뭘 하면 행복한 줄도 모르면서
누구의 행복을 논했던 것인가?
자격미달인 내가
대단한 사람인 양 스스로 속이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은 죽을 때가 되면 바뀐다고 했던가?
죽을 만큼 힘든 시기가 지나고 나서야
나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 글은 나의 오만함에 관한 것이지
이혼의 모든 책임이 나에게 있다는 것은 아니다.
원인제공은 구부 씨가 했지만
나 역시 책임을 회피할 순 없다는 의미이다.
이혼보다
자신을 위해 살아보지 못한 것이
나에게 가장 큰 비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