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잠자던 분노의 화신
오래전
한 해변가에 어린 여자아이가 혼자서 놀고 있다.
누군갈 기다리는 듯 본인 이름을 커다랗게 그리다가
털썩 주저 앉아 하염없이 바다를 쳐다본다.
눈을 감으면 그 아이가 보인다.
긴 흑발의 갈색눈을 한 그 아이는
슬픈 눈을 하고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은 표정이다.
반기지 않는 출생이었다.
그 여자아이 밑으로 아들이 태어났는데
그 순간부터 여자아이의 역할은 부모님이 정해놓으셨다.
"넌 남동생을 위해 살아야해."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 수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나의 쓸모는 집안의 보탬이 되는 것이었고 당연한 것이었다.
언니들도 그러했기에 더 거부반응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결혼 한지 얼마 안되어 인사드리러 갔을 때
친정엄마는 구부씨(전남편)에게
우리집 기둥뿌리 뽑아갔다며 원망을 쏟아냈다.
결혼 전부터 있었던 구부씨의 금전적인 채무로
(가까운 친척의 보증을 섰다.)
거액의 돈을 갚아줘야했을 때
거침없이 사기결혼이라며 구부씨를 나무랐다.
평소 갑자기 찾아오는 것도 모자라
두드리지도 않고 문을 벌컥 여는 행동은 하지 말아달라
친정엄마에게 볼멘 소리를 했더니
그날 저녁 친정 모임 때
구부씨에게 생전 듣도보도 못한 욕을 하셨다.
만만한 자식이 나였으니
사위도 만만했나 보다.
조카들과 올케가 있는 자리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묵묵히 듣고만 있는 구부씨에게 너무 미안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 길로 친정엄마와는 4년 넘게 왕래를 끊었다.
찾아와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고 연락도 받지 않았다.
내가 잘하면, 노력하면
엄마가 날 봐주고 인정해줄 거라 믿었다.
사는 게 팍팍해서 무심했던 거지
조금 나아지면 여느 집 자식처럼 사랑을 받을 줄 알았다.
잘하면 잘할수록 더 많은 것들을 요구하셨다.
엄마와 자식이 뒤바뀐 상황이었다.
이혼 후 가장 상처를 줬던 사람은 친정엄마였다.
날 부끄러워하셨다.
니 성격이 보통이 아니라서 그렇다며
이혼을 결정한 즈음
구부씨 앞에서 온갖 얘기를 다 하셨다.
너무 화가 나서 다시는 오지 말라고 했더니
성격이 어떻게 마네 그런 말을 하고 나가셨다.
친정언니들의 말에 의하면
나를 위해서라고 했다.
이혼을 하면 안되니깐
당신이 어떻게라도 상황을 만회해보려고 그런 것이라고
딸을 때린 사위에게
가슴에 피멍이 들어 갈기갈기 찢어진 딸 앞에서
구부씨에게 비굴하게 웃던 친정엄마의 얼굴을 잊을 수 없다.
왜 그러셨을까?
잘난 사위를 잃을까봐 그러셨을까?
딸 자식 이혼하는 것이 부끄러워 그러셨을까?
도대체 왜..
죽을 듯이 아픈 내 마음은 보이지 않은 것인가?
부모란 무엇인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사람들은 이해를 해라고 한다.
연세도 드셨고 니가 그냥 이해해야지
이젠 친정엄마의 인정이나 관심을 바라지 않는다.
이미 못난 자식이 되었으니
멀찌감치 잘 지내시기를 바랄 뿐이다.
다행히 자식들을 많이 두셔서 외롭지는 않으신 듯하다.
.................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두 세상이 만나는 것이다.
역으로
사람과 사람이 헤어지면
두 세상이 갈라져버린다.
이혼을 하면
배우자 한 사람하고만 헤어지는 것이 아니다.
배우자를 둘러싼 모든 것들과 결별해야한다.
구부씨의 모든 것들과 작별을 결심한 순간,
적어도 나는
돌아갈 친정이나 가족이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돌아갈 곳은 없었다.
피를 나누어도..
한때 내 모든 걸 포기하고 지지했던 가족들었지만
상황이 어려워질수록 외면을 했다.
결국 나는 혼자였다.
그저 엄마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두 아이들만
내 품에 고스란히 있을 뿐이였다.
이혼과 함께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다.
잃은 것이 있으면 얻는 것이 있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내가 얻은 것은 삶의 어두운 이면을
적나라하게 겪어내면서
사람들에게 어떠한 기대도 없고
더이상 연연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겪지 않았더라면
평생 모르고 살아갔겠지
내가 여전히 옳고 잘난 줄 믿고 살아갔겠지
영원한 것은 없다.
불행도 행복도 인연도 그 무엇도
언젠가는 끝이 있다.
그러다보면 지금 이 순간의 가치를 느끼게 된다.
"모래사장에서 하염없이 누군가를 기다리던 어린 아이는
아직도 내 안에 살고 있다.
그 아이가 세상 바깥으로 몇번 나온 적이 있는데
학습된 행동, 교육으로 다져진 이성 등을 다 제끼고
날 것 그대로의 본능과 울분, 분노를 휘감은 채 맨발로 뛰어나와
세상에 소리치고 난동을 피워
나 스스로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내가 모르던 나의 모습
앞으로 쓰게 될 한 장면을 용기있게 써내려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