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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팡팡 Dec 26. 2021

12월과 소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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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과 소멸


아름다운 길이 아닌 최단 경로는 장소를 이동할 때 쉽게 선택되어지는 조건 중 하나이다. 난 대부분의 과정에서 효율성을 무척이나 중요한 요소로 고려하여 가능한 시행착오 없이 목적지에 닿으려고 하는 습관이 있다. 그것은 건강이 되었든 해결책을 찾는 과정이든 답을 얻으려고 하는 관성이 내게 방향성이 되어 몸에 베어 있는 것이다. 


이 과정은 속도에만 국한된 개념은 아니다. 적은 에너지로 효율을 극대화하고 싶은 나의 욕심이 기본 베이스이다. 우회로처럼 보이는 아주 비효율적인 방법들이 결국에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던 경우가 더러 있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최소시간 최단거리를 최우선의 조건으로 두고  방법을 찾는다.


처음 가는 목적지는 운전자와 보행자를 더욱 긴장하게 한다. 혹여나 잘 못 들어선 길로 인해 시간을 지체하거나 예정되어 있는 스케쥴을 소화하지 못하게 되는 아찔한 순간이 일어날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더군다나 무리를 책임지고 이동해야 하는 앞에 선 리더라면 그 책임의 무게는 다르다. 


무박 3일 여행컨셉으로 동아리 활동을 진행하였다. 평소보다 늦는 아이들이 속출했다. 또 목적지에 도달했지만 어쩐지 만날 수가 없었다. 낯선 장소라 같은 표지판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기 때문일까?

익숙한 장소로 이동하는 때와 다르게 새로운 장소로 이동할 때는 우린 집을 일찍 나서거나 10~20분의 여유를 두고 출발한다. 새롭다는 것은 우리에게 더 많은 시간을 요구하는데 우리가 집을 일찍 나서는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새로운 장소 새로운 사람만큼 기대 되는 일은 새로운 길을 알게 되는 것이다. 처음 가보는 곳을 지도앱 하나에 의지한채 이동하는 것 자체는 새롭지만 최단경로를 선택하는 일은 생각보다 새롭지 않다. 그러나 그 낯설음은 단지 최단거리를 발견하는데 있지 않고 길을 잃어 버려 해메였거나, 길을 단박에 찾았을 때 오는 쾌감에 있을 것이다. 최단거리 최소시간은 이동 알고리즘의 옵션 중 한 가지이지만, 사람들은 그 자체를 즐기게 된다. 새로운 곳으로의 이동은 상당히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만 사람들을 그 결과의 아름다움보다 과정의 재미에 무게를 두기 때문일 것이다.


여행은 우리가 최선의 가치로 두었던 최단거리와 최소시간을 잊게 한다. 익숙한 곳을 떠나 새로운 장소로의 일정은 분명 교실에서는 구현해내기 힘든 모습 중 하나이다. 


고3 아이들이 졸업여행을 떠났다. 


반듯하고 네모난  공간에서 앞 뒤로 켜켜이 쌓아 두었던 교실의 작은 조각들이 더 넓고 확트인 공간으로의 이동을 통해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시야를 선물 받을 것이다. 밤 하늘의 별이 촘촘하지 않아도 각 자의 우주에서 빛을 쏟아 내듯이 같이 지새운 밤의 공기를 마시며 여행의 시간동안 나눈 지난 기억들이 더 반짝거릴 것이다.  


예전에 수복했던 머리숱이 조금씩 줄어들게 된다. 머리칼의 생명도 조금씩 가늘어 지게 된다. 머리를 쓸어넘겨도 몇 번이나 뒤로 넘거야 했는데, 이제는 한 두번에 머리가 뒤로 넘어간다. 손가락 사이를 스치는 머리의 양도 줄어든다. 치아는 조금씩 틈이 생긴다. 칫솔질로는 감당이 안되 치실도 필요하고 급기야는 식사 후에는 이쑤시개까지 필요하다. 어렸을 적 어른들이 식사 후에 이쑤시개를 찾던 모습이 슬며시 떠 오른다. 눈가의 피부도 마찬가지다. 얼굴 곳곳에 일던 피부 트러블도 하루면 금세 돌아오고, 세포 하나하나가 빈틈없이 속속들이 가득차 있었다면 지금은 조금씩 탄력을 잃어가고 있다. 나의 가족들이 허리며 손목이며 아프다고 하는 것들을 보면 빈틈 없는 몸의 구석구석에 엉성한 배열들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조금 더 느슨하게 오늘도 내 몸안에 빈 공간들이 생겨난다. 듬성해지고 헐거워지고 덜 뺵뺵해지는 것은 내가 나이가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조금씩 비어지고 넓어지는 것은 나이가 알려주는 소멸의 기쁨일 것이다. 


12월은 그런 소멸과 닮아 있다. 


한 해 농사를 마치고 아무것도 남김없이 홀가분한 땅에서 지난 날의 벅찬 호흡을 느낄 수 있듯이,  너른 들판 소복히 쌓인 눈은 비로소 씨를 뿌리던 처음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한다. 딱딱하게 죽어 있던 땅에 푸르른 녹음을 색칠하고 황금밭을 선물받고 나면 우리는 소멸의 의미를 알아가게 된다. 빽빽하게 가득차 있던 푸른 밭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채 비로소 가벼워질때 그토록 중하게 여긴 효율이라는 단어를 내려놓게 된다. 12월의 들녘을 보고 있노라면 당장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에 잠기게 된다. 


새로운 일을 하기 위해 생각을 바닥에서부터 끌어 올리고 주워 담았던 1년의 시간을 거꾸로, 12월 소멸의 계절에 와서 위로 받는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용기를 비로소 건네 받는 것이다.


나뭇잎 하나 남겨 놓지 않는 나무가 알려주는 12월의 소멸은 그래서 더 아름답다. 


1년의 시간을 고스란히 기록하고 간직하는 소멸의 순간을 아이들과 온전히 즐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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