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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랑주떼 : 다리를 벌려 높이 뛰다

김혜나 작가님의 소설 읽기의 즐거움

by 천둥벌거숭숭이

난생처음 북 콘서트에 가게 되었다.

우연히 열어본 메일에 김혜나 작가님의 강연회 초대장이었다.

신청도 하지 않았는데, 어째서?라는 물음도 잠시.

부산 창비를 통해 연락을 했다는 간단한 안내문구가 있었다.

부산 창비가 문을 연 초창기에 방문해서 창비에 대한 소식을 받기 위해 메일 주소를 적은 기억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잠깐의 고민 끝에 초청을 수락하기로 한다.

북 콘서트에 간다는 것은, 혼자 읽던 책의 작가를 직접 만나고, 그의 생각을 그의 입으로 들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기회가 왔을 때는 잡는 것이라고 배웠다.

그랑주떼 김혜나 작가님의 소설 읽기의 즐거움

강연장소는 부산역 10번 출구에서 국제여객터미널 방향으로 걷다 보면 나오는 마리나 건물 안에 위치한 '북두칠성 도서관'이다. 부산에서 가장 예쁜 도서관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곡선의 아름다움 책장에 담은 곳, 유료 대출 서비스를 진행하고 있는 꽤 괜찮은 도서관.

저녁 7시에 시작하는 일정은 늦은 귀가를 예상하게 만든다.

그래도 일찍 나가서 도서관으로 향한다. 책 읽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북두칠성 도서관은 언제나 사람들로 가득하다.

예상보다 일찍 도착했을 때 책 읽기 좋고, 분위기도 좋은 곳이라서? 나는 만화책을 보지만, 그것 또한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특별한 책을 골랐다.

[양들의 침묵]. 어쩌면 책 보다 영화가 세계적으로 유명할지도 모른다.

안소니 홉킨스의 열연과 조디 포스터의 어리고 여린 모습을 마음껏 볼 수 있는 수작이다.

이미 진하게 남은 미장센이 책을 읽는 순간부터 그려진다. 감독은 이 책과 영화를 진짜 사랑했나 보다.

긴장감 있게 책을 읽다 보니 자연스레 시간은 금세 흘러가고 곧 7시가 다가왔다.

내 생애 첫 북 콘서트다.


도서관의 한편에 강의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책만 보러 왔던 도서관에서 찾은 비밀공간이 즐겁다.

사실 김혜나 작가님의 강연에 간다는 사실에 미리 그녀의 책을 찾아 읽어보았다.

스무 살의 자유로운 대학생이 만난 [제리] 이야기, [청귤] 속에서 만났던 [그랑주떼].

이번 강연의 주제는 [그랑주떼]로 보는 소설 읽기의 즐거움이다.

그랑주떼.

grand jump. 큰 점프. 발레 용어로 나르듯이 뛰는 포즈가 제목인 글이다.

발레학원의 강사로 일하는 예정의 이야기다.

예정이는 발등이 높고 크기가 큰 발을 가지고 있다.

그녀의 발 모양에 대한 이야기로 글이 시작된다.


이야기는 인간과 인간을 연결해 주는 매개체가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해야 매력적으로 타인과 과 소통할 수 있는가에 이야기 나눠보는 시간을 가졌다.

소설은 '플롯 라인'과 '스토리 라인'으로 나누어 이야기할 수 있다.

*플롯으로 나누어 본 그랑주떼

- 오전, 예정이 근무하는 무용학원 풍경

- 어린 시절 발레를 시작한 계기 회상

- 점심시간

- 오후, 유치원 수업

- 유년 시절에 겪은 따돌림 및 리나와의 추억 회상

- 낯선 남자와의 사건 회상

- 유치원생 아이와 화장실에 가는 장면

- 사촌오빠와 얽힌 사건 회상

- 유치원생 수업 종료 후 정리

- 그랑 주떼


*스토리로 나누어 본 그랑주떼

- 유년시절에 겪은 따돌림과 괴롭힘

- 낯선 선남자와의 사건

- 사촌 오빠와 얽힌 사건

- 중학생 생시절 리나와의 만남과 발레를 시작하게 된 계기

- 오전, 예정이 근무하는 무용학원 풍경

- 점심시간

- 오후, 유치원 수업

- 유치원생 아이와 화장실에 가는 장면

- 유치원생 수업 종료 후 정리

- 그랑주떼


이렇게 나누고 보면 플롯과 스토리를 구분하기가 수월해진다.

플롯은 구성을 의미하며 과거와 현재, 미래를 오고 가며 보는 독자로 하여금 다음을 궁금하게 만드는 글의 흐름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스토리는 연대기적 순서로 글을 이어가는 작법이다.

서사적으로 글을 쓰는 것은 읽는 이로 하여금 이해하기 쉽게 하지만, 글의 재미를 돋우기에는 뛰어난 언변이 필요하다.

작가가 의도하고자 하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는 플롯을 이용하여 글의 구조를 교차하는 글들이 많다.

문예창작의 기본적인 내용으로 소설을 조각내어보니 새롭게 보였다.


작가의 글에는 작가 자신의 삶이 녹아있다. 다른 이들보다 현저하게 큰 발을 가진 작가님의 진실이 이야기에 담겨있다. 유난히 큰 발은 소녀에게 부끄러움을 선물했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은 약점이 될 수도, 특이점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이 특별함으로 바뀌는 것은 약점을 극복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사람은 거짓보다 진실을 말할 때 설득력을 가진다. 소설은 지어낸 거짓말과 같지만, 여기에 진실이 한 스푼 담기면 그 이야기는 진심과 고심이 담겨 독자로 하여금 공감과 이해를 불러일으킨다.

또 소설에는 남에게 쉽게 말하기 어려운 이야기가 주로 담긴다. 흔하게 하는 이야기는 관심을 유발하기 힘들다. 호기심을 자극하고 다음을 궁금해하는 것은 작가의 역량이다.


그랑주떼 주인공 예정은 무용학원의 강사 수습생으로 일하는 사람이다. 춤을 잘 추지 못하지만, 발레 교육을 받은, 대학생이 받는 수강료보다 더 적게 받고 있지만 자신에게 과분하다고 느낄 만큼 자존감이 떨어지는 사람이다. 발레 하는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큰 발을 가졌지만 스스로는 부끄러워한다.

남들보다 늦은 시간에 친구를 쫓아간 발레학원에서 발레를 시작하게 된 예정에게 세상은 언제나 시리고 혹독하기만 하다. 자신이 피해를 당했을 때 온전하게 보호받지 못해서, 스스로를 지켜내지 못하는 사람으로 자라 버렸다. 그녀에게 미래는 없다. 그저 오늘을 살아낼 뿐.

버려지기 싫어 먼저 버리는 것을 택하는 것은 그녀만의 자기 방어 방법이다.

사람은 누구나가 각자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음에도, 그녀 자신도 꽃이었음을 말해주는 사람이 곁에 있었지만, 상처를 치유하지 못해 흉터만을 안고 사는 예정에게는 와닿지 않는 말들이었다.

그녀가 겪었던 일들은, 나도, 내 친구도, 혹은 다른 여성들도 비슷한 경험으로 공감할 수 있는 일들이었다.

해소되지 않은 피해의 결과는 그녀의 인생을 잠식시킨다.

괜히 그녀가 애틋하고 위로를 건네고 싶어졌다. 너는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그 사람들이 나쁜 것이고, 너를 지켜내지 못한 사람들이 잘못한 거라고. 너의 잘못은 없다고.

과거의 고통이 그녀를 괴롭게 만들 때면 그녀는 스스로를 괴롭게 만들었다.

그녀에게 동상이 걸리지 말기를 바랄 뿐이다.


그랑주떼 책을 읽지 않아도 쉽게 강연을 들을 수 있었다.

물론 줄거리를 문장으로 만들어 준 작가님의 프린터가 한몫을 했지만, 숙제하듯이 책을 읽은 나는 다시 책이 읽고 싶어졌다. 상처받은 소녀가 힘차게 세상을 향해 뛰는 모습을 그려보기 위해서.

자신이 쓴 글을 톺아보며 독자들과 만나는 일은 작가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것과 같다.

투명한 작가님의 곧은 시선과 생각을 볼 수 있어 나에게 더없이 신선한 시간이었다.

중간중간 들려주시는 작가님의 인생이 그녀의 글에 담겨 있다.

방황했던 삶에서도 놓지 않았던 책 읽기는 결국 글을 쓰는 일을 업으로 삼게 만들었다.

나도 계속 글을 읽다 보면 언젠가 좋은 글을 쓰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다시금 얻는다.

역시 오길 잘했다.


도전은 생각보다 쉽고 또 어렵다.

소설 읽기의 즐거움은 읽는 사람의 취향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이과든 문과든, 공부를 위해서는 반드시 글을 읽어야 하고, 과정이 중요한지, 결과가 중요한지에 대한 자신의 취향을 분명하게 아는 것은 얼마나 글을 읽었냐에 달려있다.

나는 소설 읽기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이론서, 처세술, 문학, 역사서 등등 많은 종류의 책을 고루 읽으려고 노력하지만, 주로 읽는 책이 바로 소설이다.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는 단 하나의 주제를 말하면서, 어떻게 상대방에게 설득하는지 지켜보는 재미를 즐기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보고 내 것으로 만들기도 하고, 나와 다른 생각을 공감하고 이해해 보는 경험은 말로 하는 것과는 다른 깊이를 선물하기 때문이다.

작가님의 강연에는 명료함은 없지만, 청자를 설득하려는 그녀만의 독특한 언어가 존재했다.

사람들의 질문에 그녀의 답은 모호했지만, 그것이 듣는 이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은, 글을 쓰는 사람만의 특성이라고 생각한다.


밀도 깊은 강연의 끝은 책 선물과 작가님의 사인이었다.

나의 이야기를 재밌게 들어준 이들과 눈을 맞추고 함께 했던 시간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

떨리지만 작가로서는 정말 소중한 경험이다.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꿈만 같은 시간이다.

내 마음의 빛과 희망을 느낀 순간이다.

나도 찬찬히 뛰면서 도약해야지. 그리고 언젠가 나도 강연회를 하는 사람이 되어야지.

소설 읽기의 즐거움은 함께해서 더 좋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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