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동물원과 꽃, 그리고 나무와 함께 사는 사람들
완연한 겨울, 뉴스에서는 전국 곳곳에서 비가 내린다고 말한다.
하지만 내가 사는 부산에는 굉장히 낯선 것이 바로 눈이다.
부산의 날씨에 익숙한 사람은 겨울 추운 줄을 모른다. 가까운 경북 지역에만 가도 살을 에는 찬바람에 겨울이 춥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왜 사람들이 롱패딩을 즐겨 입는지 알게 된 순간, 추위를 많이 타는 내가 부산에 있다는 사실이 참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12월의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은 지금, 계절의 색을 마음껏 뽐내는 그곳에 가려고 한다.
바로 화명수목원이다.
길었던 여름과 스쳐 지나가는 가을을 이겨낸 자연의 힘을 느껴보고자 오늘도 부지런히 길을 나선다.
버스로 2번의 환승.
금정과 화명을 잇는 산성터널을 지나 화명수목원으로 향하는 금정구 1 마을버스를 타고 갈 수 있다고 분명 맵에 나와있었다. 하지만 버스정류장이 없다.
당황했지만, 내 앞을 지나가는 등산객에게 마을버스를 어디서 타는지 묻는다. 자신도 여기서 타본 적은 없어서 한 정거장을 걸어가 보라 조언해 주셨다.
버스도착시간 2분 전. 부랴부랴 달려 가까스로 흥아농장입구에서 그린숲속아파트에 도착한 금정1마을버스를 탔다. 버스기사님께 여쭈어보니, 버스정류장 안내판이 없어도 건너편 버스정류장과 마주 보고 서 있으면 세워주신다는 전언. 뭐든지 처음이 힘들다.
그래도 무사히 버스를 탔다는 안도감에 긴장감이 풀어진다. 정류장으로는 3개를 갈 뿐이지만 거리가 꽤 된다.
운동을 위해서는 걷는 것이 좋지만, 겨울날에는 초행길은 가급적 피한다. 헤매다가 감기 걸리면 오로지 나의 에너지만 소모될 뿐이니까.
예상 못한 해프닝은 기억을 선명하게 만드는 묘술을 부린다.
버스정류장이 없는 버스를 타고 도착한 화명수목원은 도심과 외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등산객이 많이 지나는 것을 보니 금정산의 등산코스와 함께 위치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평일에도 가득 찬 주차장을 지나 다리를 건너면 만날 수 있는 화명수목원의 시작점. 그곳에 있는 원예원이 반갑다. 겨울은 겨울이다. 추위에 언 손과 발을 따뜻한 원예원에서 녹여보자.
문을 열자마자 밖과는 완전히 다른 습도와 온도. 안경에 습기가 차서 눈에 뵈는 것이 없을 정도다.
입구에서 맞이하는 크리스마스를 알리는 꽃, 포인세티아. 초록잎과 어우러져 완벽한 원색대비를 부르며 파티를 연상케 한다. 빨간 잎이 꽃처럼 보이기도 한다. 꽃보다 오래 빨갛게 피어난 잎이 화려한 이유는, 13도 이상으로 온도를 유지하고 해가 없을 때 암막을 잘 유지했기 때문이다.
잘 맞는 온도와 습도는 때론 식물의 계절을 초월하기도 한다. 봄과 가을에 피어나는 천사의 나팔이 그중 하나다. 땅을 향해 피어난 천사의 나팔은 하늘에 겸손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늘을 바라보는 악마의 나팔과 대조적이다. 두 꽃 다 독성을 지니고 있지만, 진통제의 역할을 톡톡히 한다. 섭취하는 것은 위험하므로 금물.
덧없는 사랑, 충실, 정의의 꽃말을 지닌 천사의 나팔에 눈길이 간다. 위로 올려다보아야 마주 볼 수 있는 너는 덧없는 사랑을 꿈꾸면서도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는구나. 좋은 마음이다.
새소리가 들리는 곳을 따라가다 보니 만난 미니 동물원, 귀여운 토끼친구들이 얌전하게 물을 마시며 자기들만의 대화를 나누고 있다. 어쩜 이리 작고 귀여울까. 토끼집 옆이 바로 닭장. 원래 닭이 이렇게도 컸던가. 잘 먹고 스트레스를 덜 받는 아이들이라 그런가, 혼자만 생각해 본다.
닭과 함께 동거 중인 거위도 덩치가 심상치 않다. 안내글을 따라가다 보니 닭의 수명이 최대 12년, 거위는 최대 50년이라고 한다. 닭과 거위의 체격은 비슷했지만, 그 아우라는 거위가 훨씬 강해 보였다.
여기서도 노인 공경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일까. 왠지 이곳의 왕은 거위라는 생각이 진하게 느껴진다.
마침 내가 도착할 시간이 동물식구들의 밥 먹는 시간이었나 보다.
사육사분이 직접 문을 열고 들어가 동물친구들의 밥을 챙겨주셨다. 염소는 따로 정해진 장소에서 혼자만 밥을 먹었다. 어디가 아픈 걸까. 그래도 자연스럽게 거닐고 다툼 없이 지내는 모습이 좋아 보였다.
갇혀있으면서도 자유롭고, 끼니걱정 하지 않는 녀석들에게 이곳은 어떤 의미일까.
수목원 안의 동물원에서 활기가 느껴진다.
미로만 보면 언제나 호기심이 동한다. 수목원의 미로라 미로의 나무들이 잘 관리되어 있다.
고로 한 치 앞을 나무 사이로 볼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미로를 좋아하는 사람이고 시간이 여유로웠기 때문에 2번밖에 틀리지 않고 바로 정자를 찾을 수 있었다. 난이도가 높지 않은 미로는 성취감이 높지는 않지만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스트레스 없이 미로원 성공!
나는 언제부터 미로공원을 좋아했을까.
수학여행으로 갔던 제주도의 어느 미로 공원에서 한 시간을 헤맸던 기억이 강렬하게 와닿는다.
출구로 나가지 못하면 혼자만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에 더더욱 바른 길을 찾지 못했던 경험이 인생의 진리로 남아있다.
덕분에 내 목표는 평정심을 가지는 것이다. 내 앞에 주어진 길이 막혀 있어도 당황하지 않고 다시 돌고 돌다 보면 언젠가 제 길이 나온다는 확신이 나에게는 있다.
볼거리, 즐길거리가 많은 수목원에서도 잠시 쉬고 싶을 때가 있다. 그때 발견한 숲속도서관이 정말 반갑다.
한평 남짓한 공간에 빼곡한 책들. 대부분이 어린이도서지만, 내 안의 동심을 깨우기에 이렇게 좋은 것이 또 없다.
내 눈길을 사로잡는 책 한 권. '구름이 나에게'
푸른 정원에서 자기 몸보다 큰 똥을 굴리던 쇠똥구리가 옆에 있던 알파카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알파카는 제일이 아니라며 쇠똥구리의 부탁을 거절한다. 더위에 지친 알파카에게 구름이 다가와 그늘을 만들어주고, 비를 막아주기도 한다. 구름의 배려로 깨달음을 얻은 알파카가 과거의 자신의 이기심을 반성하고 쇠똥구리를 위해 큰 똥을 밀어주는 행동으로 변하게 된다. 작은 배려가 옆사람을 변화시키고, 그렇게 사회가 따뜻하게 변할 수 있다는 말을 구름이 전해주는 이야기가 흥미롭다. 빽빽한 활자 대신에 채워진 그림이 이해도를 한층 높여준다. 오랜만에 읽은 그림책에 마음이 몽글몽글해진다. 수목원에서 정말 많은 일들을 체험할 수 있어서 좋다.
봄여름 동안 푸르름을 뽐내었던 나무들이 가을의 색을 입고, 겨울을 보내기 위해 모든 수분을 뿌리에 축적하는 시기, 앙상한 가지에도 든든한 기둥을 자랑하는 나무들 사이에서 보인 안내판의 내용이 묘하다.
바로 '수목외과수술'. 나무도 수술을 한다. 아주 기발한 발상이다.
상처 입은 부위를 잘라내고, 방수처리와 영양제 도포, 외형 성형과 철사제거까지.
힘든 수술을 이겨낸 나무가 늠름하게 잘 자라고 있다. 말 못 하는 나무에게도 이렇게 관심과 사랑을 주면 잘 자랄 수 있다. 어릴 적 보았던 나무들에는 상처 난 부위에 시멘트가 부어져 있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기술이 발달하고 상식의 수준이 높아지면, 자연도 덩달아 건강하게 서로 상생할 수 있구나. 오래오래 건강하게 자라기를 바랄 뿐이다.
겨울에도 수목원에는 볼거리가 풍성하다. 이게 뭔 나무인지 의문이 생길 정도로 생기가 넘치는 먼나무처럼.
먼나무는 봄과 여름에 자줏빛이 도는 흰 꽃을 피우고, 가을과 겨울에는 새빨간 열매를 피운다. 꽃말이 기쁜 소식이라는 먼나무를 보며 나의 희망을 기대해 본다.
날이 급격하게 추워지면서 나도 모르게 따뜻한 실내의 건물만 찾게 되었다.
따뜻한 온도가 주는 안락함에 마음이 기울다 보니, 몸마저 가만히 있는 것에 익숙해져 버렸다.
겨울잠도 자지 않는 사람이 둔해지는 것이 본격적으로 느껴진 순간, 나갈 수밖에 없었다.
움직이기 위해 억지로 찾았던 화명수목원에서 자연의 생기를 느꼈다.
사계절의 구분이 분명한 지역에 살면서 다가온 추위조차 곧 지나갈 것이라는 확신이 살아있는 모든 동, 식물에게서 전해진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꽃이 피고 지고, 겨울에도 열매를 피우는 나무들은 철새들의 생존에 큰 힘을 나누어 주는 존재.
크기와 생김새가 달라도 함께 어우러져 살고 있는 동물 친구들.
묵묵히 하루를 살아내는 모든 존재들에게서 느껴지는 생동감이 더없이 귀하다.
오늘도 더 성장하는 내가 되었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