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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두부 Feb 02. 2021

예술가의 조건

But I nearly forget you must close your eyes,

otherwise... you won't see anything.-Alice in Wonderland

오, 잊을 뻔했는데, 당신은 눈을 꼭 감아야만 한답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아무것도 볼 수 없으니까요.



"너는 너무 예민하고  감상적이야. 그래서 감정 기복이 심해."

내가 어릴 적부터 자주 들어왔던 말이다.

그 당시 나에 대해 이렇게 말했던 사람은 확실히 좋은 뜻을 가지고 한말은 아니었다.

현실적이지 못하고, 사회생활이 어렵고, 인간관계도 원만하지 못한 피곤한 스타일이라는 뜻이었으니까.

어린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내 세포 속에 잘못된 DNA라도 있는 것처럼 느껴져 그것들을 박박 지워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는 새, 서서히 예민한 감성이나 감정들, 시각적으로 예리하게 다가오는 인상들을 깊게 담아두지 않고 마음 한편 어딘가에 툭 하고 던져버리는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한동안은 쿨한 사람처럼 보였다. 

연습하면 되긴 된다.


하지만 교정기를 뺀 치아들이 결국 제자리로 다시 돌아가려듯 나도 어느 때부터인가 원래의 내 모습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마도 글 쓰고 그림 그리면서부터인 것 같다.

왜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는 나를 원래 자리로 되돌려 놓는 걸까?


엊그제 큰 언니에게 카톡이 왔다.

동양화가이자 수필가이신 아빠에 대한 책을 제자들이 곧 출간할 예정인데 나 보고도 한 꼭지 써보는 게 어떻겠냐는 내용이었다. 제자들이 바라보는 작가로서의 누구누구가 아니라, 내 아빠로서의 누구누구 혹은 인간 누구누구 에 대한 글을 말하는 거였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마음의 우물 안에 풍덩풍덩 던져버렸던 끝맺지 못한 감정들과 어린날의 인상들이 둥둥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빠에 대한 한 에피소드를 언니에게 이야기하고 있자니 그때 내가 느낀 감정과 이미지가 다시 생각나면서 그 의미가 점점 선명해져 갔다. 언니는 아무것도 기억에 없는지 그런 일이 있었어? 하며 연신 놀랬다. 밤이 늦어 카톡을 그만 하고 나는 잠자리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예민한 내 성격이 단점이라고 생각했지만 (물론 어떤 부분에선 치명적인 건 사실이다)

이렇게 어떤 시각에서 보느냐에 따라 내가 가진 것이 장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글을 쓰며 알게 되었다.

예민하지 않았다면,

감성적이지 않았다면,

스쳐 지나가는 인상들에 대한 예리한 포착이 없었다면,

나는 그날의 일들을 내 우물 속에 던져놓기나 했을까?

그리고 그것을 길어 올려 그 의미를 지금의 나와 연결시킬 수 있었을까?

그렇게 새롭게 재조립된 의미들을 글로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었을까?

글 쓰고 그림 그리는 작업은 그렇게 나를 끝없이 날카롭게 만드는 것을 오히려 칭찬해주었다.


예민한가? 

섬세한가?

눈이 예리하단 소릴 듣나?

감성적이라는 말을 듣나?

종종 우울한가?

게다가 두통이 잦은가? (나는 이제 나의 만성두통마저 사랑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술가가 되면 될 것 같다.

그렇게 눈을 감으면 훨씬 많은 것이 보일 때가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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