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손두부 Apr 10. 2021

크리스마스 캐럴

You can let others dream with you.

But daring, never let them wake you up.-Alice in Wonderland

당신은 다른 이들이 당신과 함께 꿈을 꿀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답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 당신의 꿈을 깨우게 해서는 안된답니다.



‘오전에는 좀 쉬고, 글은 오늘 밤부터 쓰기로 하자.’

수술 후, 나는 그간 좋아하는 일이라고 떠벌리고 다녔던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를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미루고 있었다. 마음을 다잡고 글을 쓰려고 컴퓨터 앞에 앉은 날도 있었지만 어느새 나는 동영상을 클릭하고 있었고, 밤이 되면 물론 습관처럼 스케치북을 들고 침대에 들어갔지만 역시 무엇을 그려야 할지 몰라 곧 불을 끄고 누워버렸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작업하는 중에 분명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루틴이 깨져버린 이후, 그 즐거움은 희미해졌고 결국 나는 불안해진 마음을 덮기 위해 수동적인 즐거움을 찾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필요 없는 물건 쇼핑에 열을 올리는 일 같은 거였다.

그러던 어느 날 불현듯 내가 그린 그림들을 인쇄해보고 싶단 생각을 했다. 그간의 결과물들을 실물로 마주하면 그것이 내게 만족감을 줄 것만 같았고, 다시 작업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만 같았다.

며칠 안돼서 그림 그리는 동료들의 도움으로 프린트물을 제작했다.


(땡 땡 땡 땡 땡~)

어제 오후 5시쯤이었다. 동부에 사는 친구로부터 카톡이 왔다.

“감동의 도가니, 스피치리스!”

사는 곳은 서로 멀었지만(참고로 저는 서부) 그녀는 내가 글을 처음 쓰기 시작할 당시 전화 너머에서 늘 힘이 돼주었던 친구다. 그래서 인쇄물이 나오자마자 제일 먼저 생각난 그 친구에게 우편으로 보냈는데 그것이 도착한 모양이었다.

친구는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공감하고 힘을 줄 수 있었다니 만족스럽다. 나도 너와 글에 대해 토론하면서 얻는 것이 있었어”


(땡 땡 땡 땡 땡 땡 땡~)

어느덧 7시, 저녁 시간이 되었다. 저녁밥을 준비하는데 갑자기 벨이 울렸다. 현관문을 열어보니 한국으로부터 긴 여정을 마친 꼬깃해진 소포 한 개가 도착해 있었다.

두 달 전에 우리 집 주소를 묻던 한국에 사는 친구가 떠올랐다.

이 친구와는 근래에 인스타를 통해 연결이 되었고 우리의 대화는 오로지 디엠과 카톡이 전부였다.

하지만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깊은 사이가 돼 있는 터였다.

소포 안에는 그녀가 디자인 한 작품 같은 가방과 편지 한 통이 들어 있었다.

“네 글을 읽고 내 안에 따뜻한 무언가가 차오르는 느낌이 들었어. 만족해”


(땡 땡 땡 땡 땡 땡 땡 땡 땡~)

저녁을 먹고 정리한 후 방으로 올라갔다. 9시가 다 되었다. 거울 앞에서 친구가 보낸 가방을 이리저리 매보고 있는데 그때 시카고에 사는 큰 언니로부터 카톡이 왔다. (나는 주로 모든 이들과 글로 대화를 하는데 익숙한 쪽인 듯하다.)

언니는 최근 들어 한쪽 눈이 실명위기에 있다는 한국에 계신 아빠의 건강상태를 전했다.

젊은 시절의 아빠는 다른 아빠들처럼 가족을 위해 경제적 책임을 지며 달려왔었다. 

하지만 자식들을 모두 출가시킨 이후에는 전혀 다른 삶을 사셨다.

예술가로서 가지고 있던 안목, 취향, 열정, 그리고 재능이 이제 그만 사그라들거나 매너리즘에 빠져 안주하기 쉬운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아빠는 천천히 쌓아 온 그간의 작업들에 깊이를 더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누군가의 마음에 들기 위해 대충 타협한 작품도 아니었고, 더 이상 생계와 관련되지 않았기에 더더욱 독창성이 방해받는 일은 없었다.

“네가 타지에서 아이와 힘들었을 그 20년간, 사실 나는 그 20년이 정말 행복했었다. “

어느 날 아빠는 전화로 나에게 고백 아닌 고백을 했었다. 이리저리 돌려 말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날 아빠는 정말 용감하도록 솔직했다.


동부에 사는 매니저 같은 내 친구는 내 꿈을 같이 꾸어주는 것으로 심폐소생술 처치를 해줬다.

한국에 사는 가방 디자인을 하는 내 친구는 나의 글을 읽고 마음이 정돈되었고 만족감을 통해 더 이상 배고프지 않다고 말한다.

아빠는 비록 나이가 들어도 꿈에 대한 허기짐을 채울 수 있다는 것을 본보기로 보여주며 살고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살면서 “아빠만 따라오면 돼! “라고 말할 것만 같다.

눈 한쪽이 안 보이는 것쯤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웃으면서 말이다.

그렇게 어제 하루 사이에 이 세 명은 크리스마스 캐럴의 유령들처럼 갑자기 나타나 왜 내가 계속해서 글을 써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한꺼번에 퍼붓고 가버렸다.


그러니 지금 내가 이 글을 안 쓰고 배길 수가 있나!



이전 16화 Metamorphosis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