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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삶 Oct 11. 2021

내가 결정한 성공의 조건

오직 행복하기 위해서


내가 정한 성공의 필요조건은 무엇일까. 나름대로 구체적인 정의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막연하고 두루뭉술했다. 오늘 한 번 정의해보고자 한다. 내가 선택한 ‘성공’은 구체적으로 어떤 성공인가? 확실한 건 눈에 보이는 성취로 등수와 점수가 매겨지는 성적순 성공은 결코 아니다. 나는 내 주도권을 불특정 다수에게 넘기고픈 마음이 없다.


나의 성공은 곧 행복과 같은 말이니 우선 내가 어떤 것에서 행복을 느끼는지 알아봐야 할 것이다. 목적을 찾으면 필요조건 또한 알 수 있다.


어릴 적부터, 마치 태생적인 것처럼 항상 갈구하고 원하던 것은 ‘자유’다. 가만히 되돌아보니 언제고 그랬던 것 같다. 내 육체를 온전히 내가 책임지고 소유할 고유의 권리부터 시작하여 심리적인 자유, 시간의 자유, 내가 굳이 안고 가고 싶지 않은 짐으로부터의 자유, 언제고 안전을 보장받을 자유 등, 나는 완벽한 정신적, 육체적, 사회적 자유를 갈망한다. 지금도 다른 친구들에 비해 비교적 자유로운 삶을 사는 편이지만 나는 이보다 더 단단하고 강한 지반 위에 세워진 자유를 갖고 싶다. 


그리기 위해서는 건강해야 하고, 튼튼한 체력을 발판으로 하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까지 자유롭게 갈 수 있을 터였다. 삶은 끝나지 않는 여행이다. 훌륭한 여행가가 가려면 베이스캠프가 있어야 한다. 온전히 내 몸을 맡기고 쉴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 필요하다. 완벽하게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만 채워져 있는 나만의 집. 어떤 간섭도 해침도 없는 내 보금자리.


금전적인 여유는 당연히 필요하다. 건강 관리하고 잘 자고 잘 먹고 스트레스를 적게 받고 위의 베이스캠프를 가지고 유지하려면 금전 베이스가 있어야 한다. 어쩌면 당연하겠지만.


나는 나의 삶이 조금이나마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를 희망한다. 죽어 거름이 되는 것 이상으로, 후일 내게 자식이 있고 없고와 상관없이 훌륭한 사회적 유전자를 남기고 싶다. 이기적 유전자에서 말하듯, 결국 인간으로 태어난 가치가 유전자를 옮기는 통로에 불과하다면, 나는 내가 남길 영향력을 최선을 다하여 후세에 티끌이나마 거름 이상의 보탬이 되고 싶다. 내 깊은 곳에 자리한 염원이다. 이것이 가장 근원적인 야망일 것이다. 일의 성과나 인간적 가치를 인정받고 싶은 갈망을 파고들어 가 보면, 내 보잘것없는 잠재력의 최대한을 발휘해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한 가지 영감과 위안이 되기를. 혹은 그들을 찰나라도 기쁘게, 우스운 농담 한 줄기처럼 하루살이 무지개가 되고 싶다. 그것이 나보다 어린 후배, 막 자라나는 청소년,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이라면 더더욱 기쁘다. 희게 피는 보조개에 고인 한 송이 미소라도 되고프다. 절실하게. 진심으로. 반짝이는 그들의 조그만 일부라도 될 수 있다면 무한한 영광이다. 


돌이켜 보면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남모르게 보살피고 도움을 받았던 수많은 어른과 위인, 인물들이 있었다. 답답한 속을 꿰뚫을 혜안을 무심코 흘렸던 방송인부터 말도 안 통하는 이방인이지만 지혜가 넘치는 교수, 감명 깊은 책 속의 가상의 인물, 매일 도서관을 서성이던 키 작은 아이에게 높은 곳에 꽂힌 책을 손수 내려주던 사서 선생님, 지하철에서 혼자 코피를 줄줄 흘리던 내게 휴지를 건네주며 등을 쓸어주던 그날의 다정한 어른들. 그 많은 사람들이 존재조차 인지하지 못하거나 잊어버렸을 나지만 그들의 도움이 있어서 여기까지 오지 않았나 생각하곤 한다. 나도 그런 어른이 되고 싶다. 아주 사소한 뭔가라도 좋다. 가치 있는 뭔가가, 내 삶에 뜻깊고 오래갈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먹고 자고 싸다 늙어가는 삶에 무슨 거창한 의미씩이냐고 말할지 모른다. 먹고 사는 것만 해도 빠듯한데 몽상적인 생각이라고. 그런 관점에서 보면 허세일지도. 하지만 내 삶을 풍부하게 반짝거리게 하는 데 필요한 게 그런 허영심이라는 나는 기꺼이 허영을 부리겠다. 이 윤택한 빛남이 불필요한 것이라면 과연 사고할 수 있는 인간과 짐승이 무어 다른가 묻고 싶다. 


그러니 이 명예욕(?) 아닌 명예욕은 좀 더 확장된 욕심일 것이다. 긍정적 영향력이 유산이 되려면 내 직업상 아주 훌륭하고 깊이 있는 글을 써야 할테고 그러려면 사고가 확장되고 단단한 필력이 받쳐줘야 한다. 재미있어야 읽게 될 테니 스토리텔링 능력은 당연하다. 이 혼란한 시대에 태어나 여러 사회적 현상과 인류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코로나 시대를 보고 듣고 살고 있는 글쟁이로서 값어치를 해야 할 테니 사회와 시대, 주변을 살필 시야도 있어야 한다. 예리한 관찰력과 뚝심 있게 쓰고픈 것을 밀고 나갈 인내심도 있어야한다. 버거운 변화 속에서 나 자신의 색깔을 지키고 유지하기 위한 자기방어와 확신도 필요하다. 그러나 자기 고집만 피워서는 안 된다. 결국, 궁극적인 것은 소통이니까. 적절한 균형을 잡으며 내 길을 걸어야 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나는 아직 멀었다. 아주 많이. 택도 없다, 사실.


예전에는 대중성이라는 게 너무 어렵게 느껴졌는데 지금은 내가 나다워지는 게 가장 어렵다. 어쩌면 이것은 주변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순전히 나의 문제일 것이다. 내 안에 쌓이고 폭주하는 욕망의 가짓수가 너무 많아서, 복잡하고 다사다난하여 심장과 뇌가 혼란하여 이따금 멀미를 일으키는 것이다. 가끔 이유 없이 우울하거나 예민해지는 것도 이런 번뇌들 때문이 아닐까. 아는 것이 많은 게 좋다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나를 깨끗이 비워서 필요한 것만 남겨두는 게 점점 버겁다.


흔히들 목적을 이루려다가 과정에 매몰되어 자신을 잃어버린다. 예컨대, 부자가 되어 행복하게 살고 싶다, 가 꿈이었던 사람이 나중에는 돈 모으기만 급급하여 나머지를 다 잊어버리고 평생 수전노로 살다 죽는 사례 같은 건 너무 흔하다. 나는 이것이 인간이 범하는 가장 큰 어리석음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바보니까 나는 절대 그러지 않겠다고 옛날의 어린 나는 종종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하지만 서른이 넘어 나를 되돌아보건대 과연 나는 내 첫 목표를 기억하고 있나 자문해 봤더니 바로 대답이 나오지를 않았다. 애초에 나는 내가 왜 글을 쓰는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보지도 않았다.


 그저 언젠가부터, 아주 오래전부터 너무 당연해져서 의문을 가지는 것조차 의아한 것이 되었던 탓이다. 그냥 재미있으니까. 내가 가장 잘하는 거니까. 언젠가는 나 자신을 증명하는 가장 멋있는 방법이니까,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답은 더 간단했다. 바로 자유. 글을 쓰면 내가 누릴 수 있는 가장 간편하고 가성비 있는 무한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이 이야기는 내가 만드는 이야기니까. 


한 때는 내가 이 이야기의 신이라고 생각했다. 썩 틀린 말은 아니다. 창작자에게 비롯할 창, 시작할 창이 붙는 건 이유가 있다. 물론 그 무한의 자유에는 또 다른 제약과 질서가 존재해서, 다 작가 마음대로 하는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이따금 내가 만든 인물이 제멋대로 움직일 때도 있다. 이야기의 틀이 어딘가부터 완전하지 않아서 글 밖에 있는 나를 압박하기도 한다. 그럴 때면 나조차 이야기의 구성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실감하고는 한다. 결국에는 이따금 그 인력에 휘둘릴 때도 종종 있다. 도저히 벗어나기 힘든 애착, 애정, 소속감 같은 그런 것들도. 그럼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내가 이 이야기의 신이 아니라, 이 이야기들이 나의 신이구나. 주객이 전도된 셈이다. 그러나 이 역전은 내 온 일생을 통틀어 가장 강렬하고 달콤한 패배감이다. 언제든 져도 나쁘지 않은 패배일 것이다.


그러니 내가 기꺼이 무릎 꿇은 ‘이야기’는 내게 퍽 귀한 것일 테다. 여기서 모순이 시작되는데, 나는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 돈과 집이 필요하고 조금 더 욕심을 부리자면 긍정적 영향력을 끼칠 명예 욕심이 있다. 자연스레 직업상 성취와 이 욕망이 연결되면, 나의 귀한 이야기더러 밖에 나가서 내가 편히 누릴 수 있게 돈과 집, 명예를 가져오라고 등 떠밀어 보내는 모양새가 된다. 애지중지 키운 자식에게 내 탐욕을 대신 실현하라고 갖은 학대를 하면서 그게 애정이라고 착각하는 흔하고 어리석은 엄마를 보는 기분이랄까. 자유를 갈망해서 글을 썼는데, 더 큰 자유에 대한 욕심 때문에 원초적이고 가장 오랫동안 내 곁을 지킨 벗을 닦달하게 되면, 점차 글로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시장성의 논리가 작동하는 순간, 대상이 누구든 노예로 전락한다. 몇 번 그런 유혹이 있었고 그럴 뻔한 적도 많다. 전업작가로 살면 이 흐름은 어쩌면 당연하기에 저도 모르게 물들기 마련이니까. 흔히 대중성을 획득해가는 과정일 수도 있지만 뭔가를 얻게 되면 자연히 다른 뭔가를 잃는다. 거래하더라도 내가 인지한 상태에서 이뤄져야 한다. 그러나 섬뜩하게도, 사람들은 얻는 뭔가에 팔려서 잃는 무언가를 잘 알아채지 못한다. 가족, 연인, 건강, 혹은 다른 무언가. 앞만 보며 달려가면 이 반짝이는 보물들이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가속도가 높아져만 간다. 


그러니 이따금 자기 점검이 필요하다. 아니다 싶으면 누가 나를 추월하든 뒤처지든 말든 멈춰 서서 나를 돌봐야 한다. 가장 중요한 건 내 마음이다. 타인의 평가, 타인들의 행보, 주변에서 들리는 말들. 그건 모두 당신과 상관없는 남일 이다. 중요하게 들리고 일견 초조감이 들지도 모르지만 내 심장이 거부감을 드러낸다면 개소리와 다를 바가 없다. 내 최초의 목적만을 기억하라. 아직 그것을 원하는 자아와 영혼이 건재하다면, 당신은 아직 당신 그대로이다. 과정에 매몰되어 목적을 잃으면 곤란하다. 그런 어리석음은 범하지 말자. 인생은 긴 듯 보여도 한순간이고 단 한 번뿐이니까.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내 성공의 조건은 이렇다.


1. 내가 만족할 만한 글을 써낼 것.

2. 건강할 것.

3. 취향, 시간, 선택의 자유를 누릴 것.

4. 거주지의 자유/ 내 보금자리(집)/ 기동성(차)

(어느 때, 어떤 곳이건 내가 원하는 곳이 내가 머무를 곳일 것)

5. 나 자신을 돌보고 내 사람들을 지킬 만한 여유가 있을 것.

6. 나의 삶을 복잡하지 않게 정도 이상 넘치지 않는 수준으로 관리할 것.


여기서 중요한 건, 위의 조건을 실행시키는데 현실적으로 계산해야할 금전적, 체력, 능력적 품과 시간 따위다. 부자, 처럼 이들을 이루는데 사람들의 막연한 생각보다 큰 것이 필요치 않을 수도 있다. 자신의 라이프 스타일과 니즈에 따라 최대한 정확히 가늠하고 따져봐야 한다. 

1번은 최근 난항을 겪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천천히 나아가고 있다. 단지 성실함과 꾸준함이 절실할 뿐이다. 부디 조금만 부지런해지자. 제발.

2번 건강함. 갖은 영양제와 나름의 산책을 꾸준히 하고는 있지만 급한 일이 끝난 후 좀 더 신경써서 관리할 생각이다. 이사 준비로 신경이 바짝 섰더니 요 며칠 또 속이 쓰리다. 걱정이다.

3번. 이건, 충분히 누리고 있는 것 같다.

4번. 거주지의 자유. 이 또한 프리랜서인 덕에 그럭저럭 방랑벽의 삶을 즐기고 있다. 코로나와 늘어난 짐 덕분에 발이 묶였지만. 이번 이사로 짐을 좀 털어내고, 향후 2년 내로 나만의 확실한 보금자리를 마련할 계획. 그리고 이제 슬슬 운전면허 딸 때도 되지 않았나, 나 자신.

5번. 아직까지는 나 자신을 돌볼 여유만 있는 것 같다. 좀 더 노력해보자.

6번. 내가 추구하고 싶은 게 전방위적 미니멀라이프인데. 그래야 사는 데 더 확실하고 간단하고 편해질 것 같은데. 그게 가능한지 잘 모르겠다.. 이사 전 당근마켓으로 큰 짐을 처리하고는 있다. 그 밖에 하루를 잘 보낼 루틴을 짜고 있고. 모르겠다. 우선 이사부터….


곰곰이 되돌아보니 나쁘지 않은데? 라고 생각한다. 이대로 조금 더 안정화만 되면 정말 ‘성공’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면허부터 따야겠지만.....


조금 더 비우고, 자신감 있게, 열심히 행복하게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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