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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삶 Sep 01. 2021

찌질해도 괜찮아

-가끔 내 그림자 좀 안아주면 안 되나.

요즘 자존감이라든지 심리학 서적이라든지 MBTI 같은, 사람들이 이렇게 자기진단에 큰 관심을 보인 적이 또 없는 것 같다. 내가 어떤 상태고 어떤 인간인지, 내 심리를 뒤흔드는 자존감을 단단하게, 더 강하게 만들 방법은 없을지. 모두들 내면을 탐구하며 저마다의 방식으로 스스로를 규정한다.


아마도 이런 현상은 사회 전반적으로 퍼진 불안함 때문이 아닐까.


코로나에 휘청이는 회사와 가게들은 무수히 많고, 취업도 어려운데다 멀쩡한 직장도 잘리는 시대. 집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경쟁은 점점 심화되며 출산율은 날로 떨어진다. 심각한 지구 온난화로 날마다 지구촌 곳곳에서 자연재해와 끔찍한 소식이 전해지고 전쟁과 테러도 끊이지 않는다. 뉴스만 틀면 나오는 비이성적인 사람들까지. 우울하지 않기가 힘든 환경이다.


사람은 불안하면 무언가 확실한 것을 갈구한다. 흑백논리와 모 아니면 도 같은 극단적인 사고도 불안을 마주하기 버거워하는 심리에서 출발했다고 생각하곤 했다.


왜냐하면 나는 그랬고 지금도 가끔 그러기 때문이다. 나는 불안함을 제일 싫어한다. 이도 저도 아닌 것이 제일 싫다. 뭐 하나 확고하지 않은 상태에서 계속 나아가야 하거나 대책 없이 인내해야 하는 게, 우물쭈물하는 게 너무나도 싫었다. 그 시간에 빨리 더 알아보고 고민하고 발품 팔아서 이거든 아니든 결정해야 하는 거 아닌가. 왜 어중간하게 붕 떠서 시간 낭비를 하고 있는 거지. 해서 인간관계에서도 소위 우유부단한 사람들, 확고한 자기 의견을 밝히지 않는 이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일견 비겁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책임지기 싫고 나쁜 역할 하기 싫으니까 뒤로 물러나서 구경만 하는 거라고, 가끔은 박쥐 같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니까, 한창 첫 사회생활로 성질머리가 더러워진 20대 초중반의 나는 그랬다. 흠, 내 인생사 그래프에서 가장 선명하게 빛나는 흑역사의 시대다. 당시의 나를 회고하건대, 나는 지가 다 안다고 착각하는 젊은 꼰대였다. 어중간하게 머리가 굵어져서 덜 자란 뿔을 이마에 달고 쉭쉭거리는. 하하하, 지금 생각하니 너무 웃긴데. 약간 늙은 건지 아니면 다시 새로 갱신된 ‘지가 다 안다고 착각하는’ 상태인 건지는 모르겠는데 몇 년 전에는 그 시절이 쪽팔렸다면 지금은 그냥 귀엽다. 


철 없고 에너지가 펄펄 끓는 시기, 여기저기 요령 없이 생채기가 나서 제 상처를 어찌 치유하거나 방어해야 하는 지도 모르던 어린 시절. 그때의 나이기에 저질렀던 많은 실수나 새로운 도전들을 주워 먹고 지금의 내가 있는 거니까 감사해야 하나. 


아무튼 나는 자기애 뿜뿜인 여자니까 그 어설픈 철 없음이 안쓰럽고 짠하고 한심하면서 뭐 그렇다. 우리집 소가 송아지였던 시절. 다시는 못 돌아가니까 뭐 모자라도 추억보정이 되는 거겠지. 만약 그 때의 걔를 지금 당장 내 집에 데려다 놓으면서 한 달 동안 먹여 살려라, 한다면….. 음, 되게 골머리 아플 것 같기도 하고 대화가, 잘 될까? 소름 끼치다가도 뭔가 내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내 안의 다른 가능성도 찾아보고 또 개념 없는 말 하면 싸하게 식고….. 뭐 이런 과정을 반복할 것 같은데. 

(오, 이 소재 좋으니 나중에 써봐야겠다. 메모*)


잠깐 딴 길로 빠졌던 것 같은데 다시 돌아와서, 당시의 내가 극단적인 사고방식을 추구하고 지나치게 옳고 그름, 흑백을 따지며 회색 지대를 싫어했던 이유는 간단하다. 그만큼 내가 많이 불안정했기 때문이다. 뭐 하나 확고하게 정해진 미래가 없었고 나는 바늘로 찌르면 뻥하고 터질 것 같은 뭔가가 안에서 가득 꿈틀거리는데 그걸 마땅히 잘 꺼내 놓거나 포장하는 방법을 몰랐다. 어설프게 얼기설기 엮어 놓고는 난 이제 어른이야! 똑 부러진다고! 하며 말랑한 배를 볼록 내놓는 두 발로 선 송아지를 생각해보라. 뒤뚱뒤뚱 걷는 주제에 어른은. 참 우습기 그지없다. 


내가 추구하는 길이 막연하고 불안정하며 직장처럼 일정 금액의 수입이 매달 보장된 방향이 아니어서 더 그랬다. 당시 나는 작가로서는 완성된 상태가 아니었다. 내가 생각하는 최소한의 작가로서의 커트라인은 작품 하나라도 ‘그럴듯하게’ 완결까지 친 상태이다. 기승전결로 마무리를 지어야 그제서야 작가가 되는 거다. 시작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썩 괜찮은 마무리를 내는 건 아무나 할 수 없다. 작가로서의 가망성이 있는지를 볼려면 이 ‘끝’을 본 적이 있는가 아닌가로 나뉜다. 여기서 나만의 기준을 적용한다면 완결을 쳤으되 기승전똥, 용두사망이라면 그건 논외다. 끝이 반이다, 라는 말은 괜히 있는 게 아니니까.  


그런 기준에서 볼 때 당시의 나는 작가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퍽 자괴감을 느꼈고, 한 작품을 끝까지 못 끌고 나가는 나의 인내와 끈기를 탓했다. 자존심도 상하고 좌절도 했던 것 같다. 뭐 아무튼 첫 작품을 완결을 내기는 했다. 그 때가 2016년이니까 나는 작가로 산 지 5년이 되는 셈이다. 그러니 그때까지의 중간 시기는 겉으로는 그럭저럭 담담한 척을 했던 것 같지만 퍽 불안한 암흑기, 혹은 성장기라고 볼 수 있다. 청소년 때도 안 왔던 사춘기 비스무리한 질풍노도 시기가 이십 대 중반에 오다니. 세상에. 참 느리게도 컸다.


그래서 몇 년이 흐른 지금의 내가 당시를 회고하자면, 그 때의 내가 퍽 스스로 괜찮고 이만하면 행복하고 안정적이다고 착각했던 것 같지만, 사실은 아니었던 거다. 항상 목이 말랐고 불만족스러웠다. 이상이 큰데 상황은 항상 더디기만 했다. 원래 그게 인생인데 말이다. 


아무튼 자기 스스로 단단하지 못하니 주변에 여러 선과 계단을 나누고 번데기 속에 나를 가두듯 방어막을 쳤다. 상당히 우스운 꼬락서니가 아닌가. 지가 뭔데 선을 만들고 타인과 세상을 판단하는 건지. 그것도 덜 자란 그 시야로. 원래 어설프게 알면 더 나대고 안다고 착각하는 법이다. 인간이 원래 그렇더라. 찌질함을 몸소 체험해보니 퍽 여러 회한이 든다(솔직히 좀 웃기고 재밌다). 


하지만 당시에는 어쩌면 그럴 수밖에 없지 않았나 싶기도 한다. 감정적, 자아적으로 극단에 몰리면 사람은 방어적으로 변한다. 적아를 구분할 여유도 없고 그런 안목도 없으니까 바짝 털을 곤두세우고 큰 눈을 굴리면서 위협하거나 노려보는 것이다. 없는 편견도 만들어서 기다 아니다를 분별하고 아니다 싶은 것에 불필요한 거부감을 갖기도 했다. 참 쓸데 없는 에너지 낭비한다 싶은데 심리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제법 그것이 안정감을 주는 데에는 효과가 있다. 흑백이 또렷하니까 큰 고민과 사유 없이 배척하면 편리하다. 내가 ‘흑’ 쪽에 속하지 않으면 안도하고 반대 진형이 소위 악역을 대신하니까 내면의 불안한 세계가 일견 평온해지는 것만 같다. 우울함을 당분과 포식으로 해결하는 것과 흡사한 나쁜 습관이지만 말이다. 


그러니 사회 전반적으로 퍼진 갈등과 혐오가 마음 아프고 슬프지만, 이해도 된다. 불안이 가중되니 그걸 어떻게든 견뎌보려고, 스트레스와 불합리한 상황이 당장 해결이 안 될뿐더러 장기화되니 이리저리 폭주하는 것이다. 이것이 모두 개인만의 잘못일까? 그것도 있겠지만, 시대적인 상황을 한 개인이 어찌하겠는가. 우리는, 당신은, 나는 파도에 이리저리 휩쓸리는 물고기 한 마리에 불과한데. 때론 고래 같은 이가 파도를 바꾸는 것처럼 보여도 그 고래조차 파도의 흐름 타고 헤엄치는 것이다. 


나는 그저 이 또한 지나가리라, 이 또한 모든 것이 과정이리라, 그 파도를 버티며 때를 기다리는 방법밖에 모른다. 주변의 조수의 변화 속에서 나를 지키고, 지탱하고, 다음을 대비하는 것. 이리저리 고민해봤는데 일단 내가 찾은 건 이런 것이다. 미래의 우리집 소가 더 괜찮은 걸 찾아내면 거기로 갈아타겠지만 말이다.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견디는 것만 해도 대단한 것이다. 삶에는 그런 시기가 반드시 필요하다. 한때 내가 질색하던 회색 지대에서 잠복하며, 침착하고 끈질기게 인내하면서. 동시에 꾸준하게. 이것은 우유부단함과 다르다. 그 무엇보다 강력한 용기이다. 당장 전사처럼 일어나서 들이박는 건 겉보기엔 용감해 보이더라도 진짜 용기가 아닐 수도 있다. 분노와 불안을 못 견디고 냅다 부나방처럼 몸을 던지는 건 결국 도망에 불과하니까. 그 불안한 상황과 직면해서 그것을 직시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용기가 아닐까.


물론 모든 것은 양면적인 게 있어서 만용이 적절한 시기에 뛰어난 성과를 거둬서 용기로 한 단계 올라설 때도 있다. 아니 꽤 많다. 이것 또한 지난 글 ‘성공, 꼭 해야 하나’ 파트에서 다룬 시기적인 운에 해당할 것이다. 우리가 아는 많은 성공 케이스와 역사적인 영웅들은 이렇게 탄생하기도 한다. 나 또한 이런 들소 같은 성향 덕에 일을 빨리 해치우거나 뜻밖에 기회가 생기거나 한 적도 꽤 많았다. 다만 이런 ‘들이박기’가 통하는 건 갈수록 어려워질 확률이 높다. 지반 다지기와 같은 기초 공사가 끝나면 점점 세밀한 시야와 기술이 필요할 텐데, 보통 이런 건 섬세하게 상황을 살피는 냉철함, 인내심이 필요하다. 이것이야 말로 진짜 현명함이고 용기이다. 말 그대로 눈이 시리거나 눈물이 나도 부릅뜨고 버텨야 한다. 


진짜 위기를 타개하는 건 분노가 아닌 이성이다. 분노는 아주 귀한 카드다. 함부로 써서는 안 된다. 시기적절하게 그것이 필요할 때만 내면의 것을 끌어다가 써야 한다.


나는 이 진실이 너무 버겁고 어려워서 아직 능수능란하게 쓰기에는 힘이 든다. 날뛰는 야생마의 고삐를 쥐고 안간힘을 쓰는 느낌이랄까. 그래도 예전보다는 많이 발전하고 있다. 직접 구르면서 깨달은 이 사실들을 종종 되짚어 볼 때마다 나의 미숙함과 동시에 확실히 나아지고 있음을 실감한다. 그리고 이런 면모를 자신에 맞게 갖춘 내 주변 사례들도 떠올린다. 나의 현명하고 이성적인 사차원 친구 A, 대학생 시절 알바 때 잠깐 스쳐 지났던 멋진 그녀 G, 일에 열정적이고 멋있는 친구 B. 공통점은 그들은 전부 이성으로 순간의 욱함과 부조리, 비열함에 대한 분노를 자제하며 이성적으로 대처할 줄 안다는 점이다. 이것은 아주 강력한 무기다. 


그리고 이러한 이성이란 칼은 불안이라는 불 속에서 태어난다. 뜨거운 용광로 같은 불안함에 듬뿍 담가졌다가 인내의 망치로 수십, 수백번 내려쳐야 나에 맞는 검이 생긴다. 불안에 지거나 제압당하거나 휩쓸리면 안 된다. 눈을 피하는 순간 잡아먹히고 일정 수준 이하로 삽시간에 떨어진다. 어쩌면 저번 챕터의 분별력이 이와 같은 이성에 해당될 수도 있겠다.


그러니 불필요한 감정, 불안은 없는 셈이다. 다스릴 줄만 알면 그만큼 나를 제련할 좋은 도구가 또 있을까. 물론 아주 짜증나는 감정이고 지금도 싫지만 이렇게라도 긍정화 시켜야 한다. 어차피 인생 내내 달라붙어 올 거라면, 같이 갈 동무라면 조금이라도 활용할 방법을 찾는 게 낫지 않을까. 


내가 권하고 동시에 내가 했으면 하는 방식은, 그 불안이라는 감정을 아주 잠깐이라도 차분하게, 여유를 가지고 관조해보라는 것이다. 내 불안이 어디서 파생되었는지, 내가 왜 초조해하는지, 그 근원은 뭔지. 시간에 쫓기거나 남과 비교가 되거나 불만족스럽거나 원인은 다양할 것이다. 말로 하기 힘든 찌질한 이유일 수도 있다.


다 괜찮다.

괜찮다고 말하고 싶다.


내가 스스로를 포함한 내 주변의 모두에게,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은 다 괜찮다는 것이다. 우울해도 찌질해도 괜찮다. 외로워도 괜찮다. 자존감이 낮아도 괜찮다. 인간이니까 그건 당연한 거다. 당신이 인간이 아니고 아메바였으면 이런 고등 감정을 느끼기나 했겠는가? 다 우리의 뇌가 지나치게 뛰어나서, 고등생물이어서 이런 불안정함에 시달리는 것이다. 단순하게 살면 이런 고민과 스트레스도 없다. 사람은 불필요하게 뛰어나게 태어나서 참 피곤하게 사는 짐승이다. 좀 적당히 멍청하면 덜 그랬을 텐데.


내가 왜 그러는지 이유를 찾고 그것을 인지하며 인정만 해도 마음이 훨씬 개운해진다. 그러려면 일단 나 자신을 긍정하자. 찌질한 나도 나다. 이 중간 과정이 가장 필요하다. 요즘 사람들은 다 자존감이 높아야 하고 불안도 느끼면 안 되고 미련도 없어야 하고 쿨해야하고 아주 사이보그가 되고 싶어하는 것 같다. 나도 가끔 그러긴 하는데, 그러면 안 된다. 그건 인간이 아니라 인공지능이고 내 그림자를 잘라내려는 어리석은 행위다. 살아 있는 사람 중에 그림자 없는 사람이 어디 있나? 있으면 귀신이지. 센 척 좀 그만하자. 힘들 때 주저앉아 징징거리고 찌질거리는 나를 보듬어주는 게 뭐가 나쁜가. 


얼마 전 나는 본가에서 가족들과 길게 체류하다가 내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 첫 하루가 이상하게 공허하고 외로웠다. 별거 아닌데 나는 좀 놀랐다. 보통 나는 혼자 있는 걸 좋아하고 외로움이라는 정서도 그다지 느끼지 못하는 사람인데 이러는 게 면역이 없었다. 그리고 혼자 있는 동안 생각을 가다듬고 계획을 짜고 책과 영화, 강의 등의 공부를 하며 나를 가다듬는, 혼자만의 시간을 나만의 강한 무기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더 충격이 컸다. 뭐야, 내가 또 변한 건가? 나 왜 이러지? 약해졌나? 괜한 걱정에-나는 내 심리 변화에 민감하게 신경 쓰는 편이다- 싱숭생숭하다 그날 나의 절친 언니 C와의 통화 중 그걸 털어놨다. 그러자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아주 다정하고 별 거 아니라는 양 이 말만 했다.


“괜찮아. 외로워도 괜찮아.”


그 단순한 말이 얼마나 위로와 안도가 되었던지. 이따금 완벽주의 성향의 나는 나를 정말 사이보그로 조련시키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렇게까지 살 필요 없다. 그러니 저 위의 말은 전부 나에게 하는 말이다. 이래도 괜찮고, 저래도 괜찮다. 어차피 정답 따위는 없으니까. 그러니 삶이 위대하고 복잡하며 아름다운 것이다. 정답지가 정해진 인생이라면 수능 시험장처럼 얼마나 삭막하겠는가. 뭐… 가끔은 너무 머리 아파서 차라리 정해진 게 있었으면 좋겠다 싶긴 하지만.


이러나 저러나 어차피 거기서도 새로운 문제가 생기니 괜찮다. 그냥 다 괜찮다고 말하고 싶다. 지금까지 해왔듯이 다 그럭저럭 수습될 것이다. 지금 멀쩡히 살아 있잖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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