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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삶 Dec 19. 2021

대화의 인간관계

소통, 동일시, 기대감의 함정


인간관계가 어렵고 무서운 이유는 타인이라는 낯선 이방인과의 교류이기 때문이다. 

타인이 공포와 신비의 대상인 이유는 내가 그들을 통제할 수 없고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미지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당신 옆에 앉아 있는 인간에 대해 전혀 알 지 못한다.


물론 우리는 종종 옆 사람에 대해 다 안다고 착각한다. 그게 심신적으로도 좋고 안정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마치 선사시대 인간이 등 뒤를 맡길만한 동료로서 사냥을 나가기 전 원시적인 의식이라도 치르듯이, 우리는 하등 비논리적이고 빈약한 인식에 기반을 두고 우리의 안도를 위해 친구, 가족, 남편 혹은 아내, 동료의 습관이나 행위를 어느 정도 이미지화해 적립하며 내가 그를 안다ㅡ고 떠들고 다닌다. 그리고 그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내 감정과 감각이 재단하는 그의 분명한 인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주 당연하게도, 수많은 여러 사례를 들지 않아도 이는 분명 착각이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알기란 불가능하며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그가 내보이는 페르소나에 불과하다. 당사자조차 모르는 여러 가면 중 반사적으로 내 앞에서 쓰고 있는 그 가면 말이다. 사람 속은 열 길 물속보다 알기 힘들다는 속담을 생각해보자. 내 자신의 마음조차 들여다보기 힘든데, 어찌 타인을 알겠는가. 그가 당신의 부모, 자식, 형제, 어린 시절을 공유한 동무라해도 마찬가지다. 그들조차 친근한 타인에 불과하다.


물론 우리는 아군을 선택할 수는 있다. 신뢰할만하며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타인. 가족과 연인, 배우자, 자식, 친구에 대한 사랑, 우정, 애틋함. 어쩌면 이 비이성적이고 그래서 더 위대한 ‘사랑’이야 말로 인류 최고의 창조물이 아닐까? 감정 하나로 우리는 수많은 의심과 불합리, 미지에 대한 불안을 잠재우며 비교적 편안하게 잠들 수 있다. 사랑은 행복의 윤활유고 불행의 진통제이다. 여러모로 이득이며 현명하다. 오징어 게임의 주인공이 말했듯, 사람은 믿을만해서 믿는 게 아니다. 기댈 데가 없으니 믿는 것이다. 우리는 태생적으로 소속감을 갈구하는 동물이니까.


하여 인간관계, 소통, 대화는 두렵고도 어려운 평생을 해결해야 할 난제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평생을 달콤하면서도 쓰리고 행복하며 동시에 불행한 이 난관을 뚫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관계 또한 가능한 한 수용 가능한 범위 안에서, 최대한 가치 있는 소모만을 추구해야 한다. 당신이 사랑하지 않고 신뢰하지도 않으며 긍정적 기운을 주지도 않는 불필요한 타인에게 감정적, 정신적 에너지를 쏟는다는 것은 얼마나 낭비인가. 그러니 당신이 마음을 열고 진심을 다해 대화를 하고자 한다면, 상대와 상황부터 잘 가려야 한다. 내가 진심으로 상대할만한 대상인지, 아닌지, 그럴 가치가 있는 건지. 


당신은 소통할만하고 관계를 유지할 가치가 있는 아군을 스스로 택해야 하며 사소하게는 대화 또한 그렇다. 때론 그 질문이나 대화에 응하는 것 자체가 손해인 경우가 있다. 이는 소통이 아니라 함정이다. 대화를 위한 제스처가 아닌, 소통을 빙자한 미지의 타인이 건네는 독을 바른 손이다. 그럴 때엔 침묵이나 자리를 피하는 게, 상대로부터 나를 차단하는 게 지혜로운 선택이며 무가치한 낭비와 소모를 막는 길이다. 속된 말로 똥은 더러우니 피하는게 맞으며 의지와 뇌가 있는 인간이 스스로 피해야 한다. 

겨우 말하나 섞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인간은 감정적인 존재기에 가볍게 오간 말 몇 마디에 무방비하게 의식이 노출되고 무의식도 그에 휘둘리기에 십상이다. 짧은 말 몇마디에 지나친 의미 부여를 한다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그 보잘것없는 대화가 축적되어 나를 장악하고 변형시키고 생채기가 쌓인다. 그 한마디가 강력한 주문이 되어 당신의 사고를 억압하고 편견을 만들고 좁은 세계에 가두기도 한다. 그러니 낭비에서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우린 기본적인 사회적 처세술을 익히는 것이다. 하얀 거짓말, 빈말, 잡담의 기술들이 그러하다. 


악플을 예시로 들어보자. 인터넷상은 좀 더 적나라한 인간군상이 즐비하기에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가상이고 어쩌면 비문명적이다. 해서 무가치한 대화와 일방적 소통이 난무하다. 가상이지만 우린 사회적 동물이기에 무분별한 악플에는 분노하고 상처받는다. 소통에 대한 좌절감, 기본적인 인정과 존중에 대한 욕구가 실패로 돌아갔기에 모멸감을 느낀다. 이로인해 필요 이상의 고통과 인간에 대한 회의감에 빠진다. 악플이 위험한 이유다. 사회적 가면이 벗겨진 그곳에서는 기본적인 엄폐물도, 룰도 없기 때문이다. 미지의 타인에게 사방이 노출된 셈이다. 자연히 심적 타격과 불안도가 올라가며 이것이 나를 대하는 사람들의 더 솔직한 모습처럼 느껴져 더한 고통을 느낀다. 그러나 이는 착각이다. 인간관계와 소통, 대화가 심적 고통인 이유는 우리가 그들을 내 입맛대로 바꾸거나 통제할수없고 보통 그러한 내가 모르는 존재들에게 연결 욕구를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터넷은 결국 가상의 데이터이기에 진짜면서 가짜이고 일부분 통제가 가능하다. 악플을 삭제하거나 신고하는 조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통제가 가능해지는 순간 그것은 타인이 아니다. 혹은 타인조차 아니다. 그저 평생 만나지도 알아보지도 못할 타인이 뱉어놓은 허물, 허상에 불과하다. 아이러니하게도 타인이 가치 있는 이유는 그가 공포의 대상인 것과 일맥상통하다. 그가 자의식을 가진 존재로서, 현재, 혹은 미래에 나와 대등하게 눈을 맞대며 대화를 나눌 아군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서로 사랑하고 우정을 나누고 따뜻하고 가치있는 교감을 나눌 일말의 숭고한 가능성 말이다. 기대가 좌절될 때도 있지만 삶에서는 기대 이상의 보물도 분명 존재한다. 우리의 공포는 기대의 좌절에서 기원한다.


그런 의미에서, 위험하고 편리한 인터넷에서는 취할 건 취하고 불필요하고 해가 될 건 차단하고 무시하면 된다. 어차피 전부 데이터로 이뤄진 허상이며 개중 내가 선택한 소통만이 상대의 의지와 내 의지가 닿았다는 측면에서 진짜이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이와 같은 편리하고 빠른 소통이 불가능하다. 단지 지나친 직설적 편리가 대부분 그러하듯, 그 날카로움에 무방비하게 다칠 위험성이 있다는 것뿐이다.


자, 이와 같은 사례에서 얻을 수 있는 건 뭘까. 언제나 그렇듯, 나의 답은 하나다. 나 스스로 오롯해야 한다. 연결하되, 나로서 존재해야 한다. 최소한의 나 말이다. 타인과의 교감에서 우리가 가장 많이 하는 실수는 지나친 동일시와 기대다. 이로 인해 거의 모든 마찰이 빚어진다. 예컨대 내가 이것을 좋아하고 싫어한다면, 나와 친한 사람도 같은 것을 좋아하고 싫어하기를 은연중에 원하는 욕구 말이다. 또는 나의 생각과 가치관이 커뮤니티에서 올바르고 많은 이가 공감하는 의견이기를 원한다. 지나치게 나와 다른 것은 거부감이 들고 불편하다. 이 또한 크게 보면 소속감의 기대이고 인정 욕구다. 사회적 동물로서의 동일시란 결국 원시적인 욕구의 발현이고 본능이다. 강아지가 서로의 엉덩이 냄새를 맡는 것과 비슷한 행위다. 친근감을 만들고 연결하는 것. 나를 투사시키고 타인을 받아들이는 것. 이게 틀리다거나 옳지 않다는 건 아니다. 인간으로 살며 당연하고 위대한 점이다. 이와 같은 교감으로 우리는 점차 발전하고 대단해진다. 다만 이것이 과할 경우, 우리가 입는 부작용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나를 투영하고 상대를 받아들이되, 건강한 범위 내에서 적당해야 하며 선이 있어야 한다. 지나친 기대를 버려야 한다. 기대는 불가능을 전제로 한 내면의 욕심 많은 짐승이다. 애초에 통제할 수 없는 것을 욕심내는가. 이것이 인간의 속성이라면 그런 거겠지. 그러나 내가 타인을 바꿀 수 없으니 바꿀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지 않은가. 


우리는 좀 더 효율적으로 사고하며, 바깥보다 내면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내 안의 심오하고 광오하며 두려운 카오스를 말이다. 답이 나오지 않는 탐구일 테지만, 답을 남에게서 찾는 것보다는 낫다. 어차피 타인은, 길을 걷다 우연히 동행 혹은 스쳐 지나갈 ‘그자’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불가능을 납득하려 하니 괴로운 것이다. 이해할 수 없다면 그저 그대로 두면 된다. 내버려두고 지나쳐 내 길을 걸으면 그만이다. 이 간단한 것이 그리도 어렵다. 이런 어리석음이 처음도 아니고 마지막도 아니겠지만 우리는 종종 이런 부질 없는 짓을 반복한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나는 불완전한 인간이니. 하지만 멍청한 것도 싫고, 불행하고 아픈 건 더 싫으니 이전보다 덜하기 위해 나를 다스리려 노력할 뿐이다. 나는 어리석지만 분명 발전하는 짐승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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