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대삶 Dec 07. 2021

내 인생에 악플은 당연한 것

악플이라는 악의 연대기


악플이 무엇인지 모르는 현대인은 없을 것이다.


악플은 일상적인 악과 적의, 시기, 질투, 업신여김, 열등감, 그 밖의 여러 인간의 어두운 일면을 적나라하게 내비치는 사회적 현상이다. 어쩌면 이것은 인터넷에 국한되는 일만은 아니다. ‘뒷담화’, 평판을 빙자해 주변인을 깎아내리는 일, 그 밖의 참으로 비열하고 사소한 자질구레한 악의들. 이와 같은 것들은 인류의 배설물 같은 거라서 어느 문화권, 어느 인간 집단이든 존재치 않는 곳이 없다. 인간은 위대한 점들이 많지만 참 못난 존재이기도 하다.


악의는 가장 치명적인 독이다. 말 한마디가 그날 하루의, 일 년을, 평생을, 어쩌면 사람의 영혼과 그의 인생을 파괴할 수도 있다. 그토록 강력하다. 과장된 표현이라고 생각하는가? 글쎄. 누군가의 별거 아닌 말이 깊은 상처가 되었던 적이 없는가? 문득문득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거나 똑같은 단어에 저도 모르게 과민반응하고 가슴이 섬뜩하고 불쾌해진 적은?


생채기 없는 사람이야 어디 있겠는가. 다만 그런 악의에 수십, 수백, 수천 번 노출된다면? 아무리 건강하고 아름다운, 뛰어난 사람이라도 죽는다. 고통스럽게, 독에 중독되어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다가 죽는다. 질식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한다. 


우리는 이미 이러한 사례를 잘 알고 있다. 당장 몇 명의 이름과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 과연 그들이 죽을 만큼의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하는가? 그저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고 혀를 차고 말 건가? 과연 그 사람들이 나약해서 그런 결과가 생겼다고 자위하고 싶은가?


아니다. 사람은 생태계에서 유일하게 신체적 상처 없이 상대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다. 간사한 뱀 같은 혓바닥과 손가락 몇 번의 딸깍거림 만으로도 영원에 가까운 타격을 입힐 수 있다. 적절한 여론몰이가 통하기만 한다면 자신이 징벌을 내리러 온 신이라도 된 양 정의감에 도취하여 사람 하나를 도살하는 마녀사냥에 동참해서 우월감을 느끼기란 참 쉽다. 요즘은 그런 행위가 익명성을 입고 아주 쉬워진 시대다. 


악플은 그토록 무섭다. 보이지 않는 뱀처럼 사회 곳곳에, 우리 곁에 똬리를 틀고 맴돈다. 이 뱀이 진정 무서운 것은, 내 스스로 하고 있는 행동이 무분별한 비난이고 무례이며 죄라는 것을 인지조차 못한다는 것에 있다. 

머리로는 상대방이 같은 사람이고 당연하게도 개인적으로도 아는 사람이 아니기에 함부로 제한된 정보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다. 다만 인터넷 공간에서 혹은 현실에서도 이는 쉽게, 자주 망각된다. 마치 토끼굴에 얼굴을 처박고 있으면 제 눈에 보이지 않으니 저도 안 보일 거라 착각하는 멍청한 토끼의 어리석음처럼, 사람들은 자신의 악의를 사소하게 취급한다. 


‘어차피 나 하나의 말인데 뭐 어때.’

‘솔직히 나만 이렇게 생각해? 틀린 말 아니잖아.’

‘남들도 다 하는데 뭐.’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겠어? 쟤도 욕먹을만한 짓 해서 이렇게 욕 먹는 거겠지.’

‘유명인이면 처세를 잘해야지. 돈도 많이 벌면서 이 정도쯤이야 감당해야 하는 거 아니야?’


흘러 보면 그럴듯한 것 같지만 세세하게 보면 제 책임을 회피하는 헛소리다. 비겁하고 비열한 자기 합리화다. 객관적으로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많은 갑론을박은 이만하게 커질 일도 아닌데 감정에 지배된 대중들의 흥분에 과도한 악의로 눈덩이처럼 부푼 경우가 적지 않다. 본인들도 무의식중에 알지도 모른다. 


어라,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이게 이렇게 커질 일인가? 따지고 보면 남일 인데, 왜들 이렇게 죽기 살기로 달려드는 거지?


위장된 정의감에 도취하는 건 어쩌면 마약과 같을지도 모른다. 평소 그와 같은 열정에 취할 기회가 없던 사람들은 성난 소처럼 날뛴다. 아마 알 것이다. 유명인들이 엮인 꽤 많은 수의 사건들은 오해나 해프닝으로 끝날 때도 잦다. 딱히 범인도 피해자도 없는 촌극으로 대한민국이 들썩이고 뉴스까지 탄다. 하지만 대중들은 펙트에 관심이 없다. 내가 속할 다수의 정의의 편과 그 쪽에 서서 돌팔매질하며 죄인을 단죄한다는 비틀린 쾌감을 느낄 수 있는 자리가 깔리면 나머지는 아무래도 좋다. 깊은 사고나 생각, 의심도 하지 않는다. 어차피 고통은 당신의 것이 아니다. 그러다 열정의 축제가 끝나면 바글거렸던 군중들은 썰물처럼 흩어진다. 쓰레기와 굴러다니는 깡통들, 끝까지 남아 아옹다옹 거리는 소수를 제외하면 이미 사람들의 관심은 그곳을 떠났다. 텅 빈 공터에는 웅크린 채 돌팔매질을 견딘 당사자만 남을 뿐이다.


인터넷 상의 일이니까 실질적인 흔적이 남지 않으니, 그리고 그런 댓글 안 보면 그만 아니냐, 라고 속 편한 말을 하면 되니 대중들은 어지간해서는 큰 심리적 타격을 느끼지도 않는다.


그저 제물이 된 당사자만 아플 뿐.


물론 이따금 성범죄자라던가 사회적 비난을 받아 마땅한 이들도 간혹 있다. 하지만 이 공개재판은 여러 사례를 따지지 않더라도 매우 위험하다. 우리는 이미 많은 희생자들을 알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런 피해자가 사라지지 않을 거라는 냉담한 사실도 알고 있다. 씁쓸해하고 악플러들을 비난한다 해도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인류의 면모는 아주 오래전 고대 시절에도 존재했기 때문이다.


본인과 다르게 낯설고,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위협을 느낄만한 대상이 있으면 수많은 억측과 미신적인 모함, 험담들이 뒤따랐다. 실제로 이런 협잡으로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은 역사책을 몇 권을 써도 모자랄 것이다. 

개중에는 죽음으로서 더 위대해진 분들도 있다. 예수님이 그렇다. 부처님도, 그 밖에 수 많은 위대한 이들이 간사한 악플에 삶 전체가 흔들리고 고통을 겪고, 목숨을 잃었다. 이런 사례들을 보면 인간으로서 환멸감이 든다. 이와 비슷한 일이 지금도 반복되고 있는 것들을 보면 그렇다.


가장 끔찍하고 두려운 사실은, 나도 모르게 저런 가증스러운 정의 연대에 참여한 적이 과연 없는가, 하는 것이다. 스스로에게 자문할 때면 속이 차갑게 가라앉는다. 남들이 떠드는 소리에 선동되어 놀라워하며 수군거리고 남 일인 양 구경한 적은 누구나 있으니까.


이와 관련된 경험을 아주 오래전 이십 대 중반에 한 적이 있다. 인터넷상의 폭로, 피해자와 가해자가 헷갈리는 사건들은 너무도 흔히 벌어지는 일이지만 그 자극성은 자칫 사람의 판단력을 흐트러뜨린다. 이때 확실히 배운 것은 내가 보고 판단하는 게 가장 정확하며 내 분별력을 기르고 그것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타인이 뭐라건, 주변 다수가 뭐라 수군거리건, 설사 공신력 있는 뉴스데스크가 하는 말이라도 무분별하게 수용하는 건 위험하다. 가짜 뉴스와 오보가 판을 치고 너무 빠른 정보의 전달에 아직 설익은 정보가 부작용을 일으키기도 한다. 무섭게도 경솔하게 섣불리 판단을 내리고 믿는 것 자체가 나는 물론이고 타인에게도 피해를 줄 수 있는 정보화 시대가 아닌가. 참 편리하고 무서운 시대다.


그러니 우리는 나 아닌 누군가와 나 자신을 위해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말 것이며, 온갖 곳에 도사린 악플에 스스로 방어하는 방법을 알고 있어야 한다.


인간관계 사이의 모든 갈등을 풀 방법을 제시하는 건 아니다. 이건 신이 강림해도 힘들 거라 생각한다. 다만 내 경험에 기반하여 심리적으로 충격을 더는 방법을 제안하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람으로 살며 악플을 한 번도 안 받아볼 수는 없다. 그런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무인도에서 혼자 살면 모를까.


내가 ‘나’로서 살기 위해서는 당연히 나와 다른 자들과 부딪친다는 뜻이고, 이는 그들과 엇나갈 수도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악플은 인터넷뿐만 아니라 sns, 뒷말 등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떠도는 모든 악의들을 일컫는다. 개중에 나는 작가 생활을 하면서 어쩔 수 없이 악플들을 경험했다. 그럴 듯한 비평을 빙자한 비난부터 말도 안 되는 트집, 무례한 빈정거림 등 참 별별 게 다 있다. 이십대 초반에는 분노했다. 화가 나서 공지를 쓰고 댓글을 삭제하고 언짢음을 표현했다. 확실히 화를 내고 나면 뒤끝이 없기는 하다. 


다만, 살면서 겪는 수 많은 역풍에 전부 맞불을 놓는 것은 힘든 일이다. 외려 에너지를 더 낭비하거나 긁어 부스럼이 될 때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적당히 묻어가거나 무시하고, 타협하는 과정을 머리가 굵어져 가며 배운다. 삶의 지혜일 수도 있고 때에 따라 굽히고, 유연해져 가는 과정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일방적인 공격에는 꼼짝없이 다치고 상처받는 게 사람이다.


살다 보면 때론 당신이 별다른 죄를 짓지 않더라도 비난을 받을 때가 있다. 함부러 취급받거나 무시를 당하기도 한다. 특히 나를 향한 것을 넘어 가족이나 내 소중한 사람들을 모욕한다면? 그건 역시 참기 힘들다.


나는 참 이해가 안 갔다. 대체 소설 하나가 뭐라고 저 픽션에 부정적인 감정을 표출하고 때론 같은 사람을 공격까지 하는 걸까. 취향이 아니면 안 보면 되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인신공격을 하는 극소수의 몇이 참 이해가 안갔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혹은 내 앞에서도 저렇게 말할 자신이 있는 걸까?-물론 그 정도 수준의 악플은 몇 년에 걸쳐 정말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나는 질문 자체가 틀렸다는 걸 알았다. 내가 이해가 가능하다면 이런 악연이 성립하기나 했겠는가? 그들은 그냥 아무 생각이 없고, 본인 안에 있는 가득 찬 뒤틀린 배설물들을 우연히 그들 눈에 띄고, 자극한 시기 적절한 과녁에 던졌을 뿐이다.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언젠가는 이 사실에 더 화가 났는데 지금은 그러려니 한다. 동네 개가 내 신발에 똥을 쌌다 한들 어쩌겠는가. 본래 짐승인 것을.


어쩌면 그 소위 ‘눈에 띈’, ‘과녁’이 될만한, 조금 속된 표현으로 ‘어그로를 끌만한’ 것 자체가 내 재능일 수도 있으니 긍정적으로 위안을 하는 게 현명할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감정을 건드는 컨텐츠는 썩 실패한 것만은 아닐 테니까. 혹여 당신이 가는 곳마다 악플을 받는다면, 혹은 공들여 만든 작업물이 정도 이상의 비난을 받는다면, 한 번쯤 이리 생각해보는 것도 괜찮다. 


어? 어쩌면 이걸 잘 다듬으면 나도 재능이 있는 걸지도?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다. 사람들은, 대중은 냉정해서 아무런 매력도 없는 것에는 욕조차 하지도 않는다. 애초에 눈에 띄지도 않는데 뭐하러 시간을 낭비하는가? 눈에 띄는 것은 요즘 시대에 재능이고, 능력이다. 관종 경제라는 말도 있다. 관심을 받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널렸지만 그걸 이루는 건 극소수다. 유명 유튜버, 인플루언서, 탑스타, 아이돌, 심지어 의사나 학자, 교수도 발언력이 좋고 좌중을 집중시키는 매력이 있어야 그 분야에서 성공 확률이 올라간다.


그리고 참 신기하게도, 이런 관심도가 올라가면 귀신같이 그를 싫어하는 이들도 는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는 본인의 호불호를 적극적으로, 자극적인 언어로 표현하며 자신의 의견이 대세이며 동의해주기를 은연중에 갈망한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불호를 당사자가 알아주기를 원할 터다. 이조차 어린아이와 흡사한 갈망이라 얼마간 짠하고 가엾기도 하다. 진짜 싫으면 그냥 피하면 된다. 굳이 그 언어폭력을 상대가 알아주길 바라고 남들이 동조해주기를 바라고…..  기묘하다 싶기도 하다. 이는 대체 무슨 기이한 욕구란 말인가.


정정당당한 불호라면 그저 그대로 있으면 된다. 전전긍긍 남들 눈치를 보며 센척할 게 아니라. 그대는 그대일 텐데 대체 무엇이 불만인지? 하긴 내면이 단단하고 건강한 자라면 굳이 그런 행위는 하지 않을 터다. 이것이 불법행위라는 자각도 없을 정도로 판단력이 상실된 상황일지도 모른다. 스트레스가 과중된 상태라던가. 그 날 하필 안 좋은 일이 있었을지도 모르지. 나이가 어려 악의를 다스릴 줄 모를지도 모른다.


여하간, 세상이 돌연 유토피아가 되거나 전 인류가 열반에 들지 않는 이상 이런 일은 계속될 것이다.

그래서 내가 생각한 건 어차피 겪을 일이라면 내가 납득하게 정의하는 것이었다.


나로 살고 싶으면 악플을 받을 수밖에 없고, 그런 삶이 내가 처음도 아닐 것이다. 무려 예수님은 그 악플 때문에 돌아가셨다. 전국민의 사랑을 받는 국민 mc 유재석 씨도 악플을 받는다. 그럼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그분들보다 훌륭한 것도 아닌데, 악플 받는 건 당연하지 않은가.


예수님은 돌아가셨지만, 다행히 나는 아직 멀쩡하게 잘 먹고 잘살고 있다.


그거면 되었다. 내가 완벽하지 않아서-애초에 완벽할 필요도 없지만-, 내가 이상하고 못나서가 아니라, 삶은 원래 무수한 악플의 역사다. 당신이 특별히 못나서가 아니다. 악플은 그냥 악플일 뿐이다. 굳이 이해할 필요도, 어처구니 없는 요구나 지적을 다 받아줄 필요도 없다. 꼭 자가점검을 하고 싶다면 당신을 가장 아끼고 사랑하고 그대의 성장을 진정으로 기도해주는 나 스스로에게 묻자. 신뢰하는 동료나 친구도 좋지만 나는 불안할 때일수록 본인 내면에 집중하기를 권한다. 내가 못 미덥다면 그런 나 자신부터 단련해라. 나를 보듬고 격려하고 위로해라. 내가 단단하지 못하니 부정적인 외부 에너지에 휘둘리는 것이다.


그런 무의미한 감정 배설물이 당신을 해치도록 두기에는 당신이 너무 아깝고 소중하다.



        

이전 11화 대화의 인간관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