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대삶 Jul 13. 2022

인간의 영혼에는 구멍이 있다.

고독과 공허. 실존주의?

나는 외로움을 모르던 사람이었다.

학창 시절 혼자 화장실 가는 걸 못해 단짝 친구와 팔짱을 끼고 가는 여자애도, 외롭다며 저 자신을 탕진하는 사람도, 한시라도 그 공백을 못 참고 카톡과 SNS로 타인과 연결되기 위해 애쓰는 이들도, 고독을 떨치기 위해 온갖 어리석은 짓을 자행하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하는 이들도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대체 왜들 저리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것인지?


혼자 있는 것이 일견 따분해 보일지 몰라도 좋은 점이 얼마나 많은데. 시끄럽지 않고 편안하고 무엇이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 남의 눈치를 보거나 내키지도 않는 언행을 하지 않아도 된다. 정 심심하면 책을 읽어도 되고 요즘에는 ott서비스가 발달해 원하기만 하면 클릭 몇 번으로 영화나 드라마를 실컷 볼 수 있다. 그래도 심심하면 글을 쓰면 되고 친구들과 연락하거나 가족과 통화를 하면 된다. 산책하거나 근처 사는 친구가 퇴근하면 저녁을 함께 먹으면 되고.

사실 나는 혼자 가만히 있어도 외로움을 잘 못 느끼는 인종이었다. 외려 타인에게 신경 쓰고 그들에게 맞추느라 에너지를 쓰는 것보다 홀로 시간을 보내는 게 편하고 자유로웠다.


하지만 언젠가 부턴가, 내가 진짜 어른이 되기 시작하면서 생전 처음으로 '고독'이라는 것을 생생하게 느끼기 시작했다. 아마 처음 서울에 자취하기 시작하면서 내 생애 최초의 고독이 나의 방문을 두드렸던 것 같다. 


이 때의 나는 무척 당혹했다. 생소한 이 허한 감정이 뭔지 조차 깨닫지 못한 채였다. 이게 뭐지? 별다른 문제가 없는데도 척추를 관통하는 공포와 닮은 외로움이 덮쳐 왔다. 그것은 불안과도 흡사했고, 세상에 남은 최후의 인간이라도 된 것처럼 기이한 기분이었다. 


당황이 가라앉고 난 뒤에야 나는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외로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대체 왜? 물론 당시의 나는 부모님의 품에서 독립해서 생전 처음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에 홀로 떨어졌고 혼자 살고 있었다. 충분히 외로움을 만끽해도 될만한, 외로움에 져도 용서될만한 조건으로 충분하지 않던가. 그러나 왜 하필 지금인지? 외로움을 느낄만한 환경이 지금이 처음인 것도 아니었다. 대학교 때도 자취를 했고 혼자 여행도 곧잘 가던 편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언제나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디기 위해, 혹은 그 시간을 더 연장하거나 그곳으로 도망치기 위해 찾아 헤매 왔다. 기억이 처음 시작된 순간부터 내도록 그런 적이 그렇지 않은 적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아마도 날 적부터 타고난 나의 천성이, 혹은 흔히들 말하는 성장배경의 한 축이 그런 내 특성에 영향을 줬겠지. 그러니 나는 고독이 특성화된 인간의 삶을 살아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스물여덟의 나는 고독에 익숙하거나 그것을 즐기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저 지금까지의 나는 조금 둔감했던 것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아니면, 내가 변했거나. 높은 확률로 둘 다일 것이다. 어쩌면 내도록 있던 것을 이제야 인지하고 개념을 정의한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어쨌건 나는 이유 없이 외로웠고 그게 신기했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서 이와 같은 상태를 말했다. 그리고 내가 갑자기 왜 이러는 지 모르겠다고 털어놨다. 그러자 그녀는 말했다. 아마 일시적일 거라고. 본인이 오랫동안 봐왔던 나란 사람은 그런 고독한 정서를 계속 품고 있을 만한 사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다행히도 그녀의 의견은 옳았고 한 달 후 나는 기세 좋게 서울살이에 적응해 매일매일 새롭고 재미있는 것들을 파고드느라 바빴다. 그렇게 한동안 고독은 나를 두고 도망갔다.


하지만 고독과의 동거는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그는 이따금 적절한 환경과 조건이 갖춰지면 나를 찾아와 가만히 내 뒤에 서 있었다. 물론 이것은 썩 유쾌한 감정은 아니다. 긍정과 부정 중 고르자면 후자에 가까울 것이다. 우울과 비슷하지만 조금 더 허하고 배고프지 않은 굶주림과 같은 감각. 당연하게도 일반적인 인간의 반응대로 나는 그것을 떨치려 애썼던 것 같다. 신뢰하는 친구와 술을 마시거나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몰입할 만한 뭔가를 만들어 하고 또 그것이 익숙해지면 새로운 것으로 계속해서 갱신했다. 많은 이들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듯, 이는 늪에서 자유형을 하는 짓과 비슷하다. 무의미한 사이클이다. 이것은 찰나의 위로나 도피에 불과할 뿐, 일시적인 효과는 있을지 모르지만, 근원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 


이쯤 되니 고독은 나에게 우울과 같은 단어가 되었다. 이를 설명하거나 표현하고 싶은 갈망에 이런 심정을 글로 토로하기도 했다. 어느 기억나는 현명한 독자는 내게 이렇게 충고했다. 자신은 그럴 때면 우울한 음악을 듣거나 노래를 부르며 그 멜랑꼴리함을 즐긴다고. 당시의 내게는 이는 매우 멋지고 현명한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고 나도 바로 곧장 그것을 따라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나의 친애하는 친구는 자신은 그럴 때면 일부러 더 약속을 잡고 친구들을 더 자주 만난다고 했다. 이건 그래도 쉽고 빠른 방법으로 보였다. 


그 때서야 나는 깨달았다. 이 고독이라는 것이 모두에게 조금씩 다른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머리로만 알고 있던 '외로운 정서'를 피부로 체감하고 느끼자 비로소 모든 인간은 외롭다, 는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 후 나는 고독과 적절하게 친해지고 익숙해졌다. 처음처럼 당혹스러운 침입자처럼 여겨지지 않았다. 때론 그것이 외려 편하고 감상적인 정서에 충분히 잠겨서 취해있을 만한 합당한 이유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이따금 은근한 안개 같은 그것이 제법 어른스러운 멋처럼 느껴지거나 무언가 새로운 시도나 도전, 밀어두었던 뭔가를 해결할 원동력과 발돋움을 할만한 빈 공간이 되기도 한다. 나는 이제 고독이라는 고약한 친구를 제법 다룰 수 있게 되었다고 믿었다.


하지만 일상에 지쳤던 어느 날,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가족들 사이에 앉아 사랑스러운 조카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던 화기애애한 그 찬란했던 순간, 날카로운 가시처럼 서늘한 고독의 손이 가만히 등골부터 기어 올라와 심장 깨를 살살 어루어 만졌다. 이유는 모른다. 아마도 오랜만에 뵈었던 부모님의 머리카락에 희끗희끗하게 내린 서리가 더 짙어진 것을, 몇달 전보다 훌쩍 큰 조카를 보며 시간의 무상함을 절실하게 깨달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역시나 이번에도 나는 당황했다. 한 번도 고독은 내가 사랑하는 이들과 있을 때 찾아온 역사가 없었다. 인간은 군중 속에서도 고독하다, 인간의 어찌할 수 없는 고독함에 대해 살갗에 닿듯 깨달은 순간이었다. 그 모든 말들이 사실이었다. 나는 헛웃음이 났다. 


그 때서야 만지듯이 그것의 실체와 마주했다. 아주, 선명한 촉감으로.


고독이란, 결국 인간은 태생적으로 홀로 갈 수 밖에 없는 존재의 갈증이며 완연한 개인으로서의 감각을 일컫는 것임을.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에 앉아 나는 생각했다. 이 고독함의 이유는 무엇일까. 한때 내가 몰입했던 삶의 이유와 목적이라는 것이 생각났다. 나는 내가 이미 이유를 알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다만 조금의 정리가 필요할 뿐이다. 이 근원에서부터 올라오는 것만 같은, 나의 일부와 같은 이것은 대체 뭘까? 모든 인간들이 자연스레 겪는 것과 같은 이 전염병 같은 것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리하여 나는 결론 내렸다. 이것은 영혼이 원래부터 갖고 있는 구멍과 같은 건 아닐까. 이 고독은 생채기나 피치 못할 사고로 얻은 부상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느낌이 난다. 조금 더 근본적이고 근원적인 감각. 입과 귀, 코처럼 당연하게 뚫린 구멍과 같은 것 말이다. 그렇다면 이 구멍이 꼭 '상처'와 같은 것으로 볼 필요가 있을까? 원래부터 영혼의 형태가 그리 생긴 것이라면, 내 영혼은 동그란 진주가 아니라 애초부터 도넛 모양을 하고 태어난 건지도 모른다. 나 외에도 모든 인간들이.


그렇다면 이 구멍의 의미는 공허이고 고독일 것이며, 이는 천부적인 본질을 가리킨다. 왜 공허한가. 왜 비어 있는가. 빈칸이 꼭 나쁜 것인가? 빈 백지여야 새로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이는 탄생과 창조를 암시하고 무한한 가능성과 자유를 상징한다. 그렇다. 이 미세하고 조그만 구멍은 유두리 있는 가능성이고 기회다. 정해진 것이 없는 창조의 혼돈이다.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고독하지만, 그렇기에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조금 더 쉽게 말해보자. 인간은 무의미하게 태어난 존재다. 하다못해 식탁에 놓인 그릇 하나도 목적을 가지고 태어나는데 인간의 탄생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저 잉태했으니 태어났다. 인류는 의식적으로 여러 화려하고 굉장한 의미와 상징들을 인간의 삶에 부여하고 반짝이는 날붙이들로 치장했지만, 근본은 맨몸뚱이의 살덩이와 뼛조각에 불과하다. 다른 것들은 우리가 안심하고 스스로 정의하기 위한 허상에 불과하다. 우리는 지구가 낳은 돌연변이고 우주의 먼지이다. 하지만 어린 가이아가 잠든 씨앗처럼 고귀하고 고결한 먼지다. 


인간은 무가치하기에 가치 있다. 무의미야말로 유의미를 증명한다. 우리에게는 나 자신을, 나의 미래를, 나의 존재를 결정하고 선택하며 삶을 탐험할 권리가 있다. 이 자유야말로 인류가 가진 고귀한 특권이다. 


하지만 자유가 항상 행복하지만은 않다. 축복이 언제고 유쾌하고 즐겁기만 하지 않다는 걸 잔인한 신들이 지배하는 그리스로마 신화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자유는 곧 혼돈이다. 극단적인 자유, 무질서한 바다, 분별력이 없는 광인처럼. 혼돈에서 창조가 태어나지만, 혼돈은 때로는 재앙이다. 새카만 파도처럼 소리없이 스스로를 삼켜버릴 수도 있다. 새하얀 빈공간은 그 자체로 존재를 압도한다. 그 막연함, 끝없는 지평선을 보고 있는 막막함, 무한한 우주에 내던져진 표류자와 같은 광오한 공포. 


삶이란 원래 그렇다. 무엇이 정답인지를 모른 체 더듬더듬 장인처럼 앞을 더듬으며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동행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홀로 치러야 할 게임이다. 그럴 때면 우리는 절망하며 이리 외친다. 차라리 누가 답을 가르쳐줬으면 좋겠어. 내게 정답을 알려주세요. 나는 어떻게 하면 되나요? 저마다 통곡하고 몸부림치며 사방을 헤맨다. 종교, 철학, 과학, 심리, 돈, 성공, 명예, 명상, 요가...... '정답'의 이름은 셀 수 없다. 또한, 이것도 정답이자 정답이 아니다. 그러니 삶은 미궁이고 고통이고 두려움이다. 우리는 무력한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린다. 이런 것 따위 알고 싶지 않았어. 다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그때가 좋았는데.  미물인 인간은 무한의 자유 앞에서 절망한다. 


그러나 이것을 뒤집어 보면 아름다운 한 점의 추상화다. 우리는 두려워하고 애쓰고 피하고 악을 지르며 저마다의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이 저주스러운 자유가, 빈 공간이, 내동댕이쳐진 제멋대로인 운명이 없었다면 우리는 유의미한 뭔가를 단 하나도 만들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시시때때로 느끼는 공허와 외로움, 고독은 인간이 태생적으로 갖고 태어난 '무의미함'의 파편들이다. 적막한 자유와 발 앞에 놓인 광활한 광야의 먹먹한 허탈함, 거기에 남은 제 보잘것없는 발자취를 되돌아보며 저 홀로 떠올리는 개인적인 회한에 불과하다. 


그러니 우리는 죽을 때까지 무의미에 맞서 발버둥쳐야 한다. 자신만의 가치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위해 기를 쓰다 죽어야 한다. 그 간절함과 처절함이 우리의 숭고한 존재 의미일 테니까.


그러나 나는 또한 너무 애쓰지는 말라고 말하고 싶다. 어차피 언제나 물과 시간, 사계절은 멈추지 않고 흐르고 있고 순환하고 있다. 그 거대한 흐름에 속한 우리가 제아무리 기를 쓰거나 애를 써도 될 것은 되고 되지 않을 것은 되지 않는다. 물론 아름다운 무언가를 당신의 노력과 재능이 해낼 수도 있을 것이다. 동시에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과정이다. 기억하라. 그대의 몸부림이야말로 이 우주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귀하며 가치 있는 것이라는 걸.


니체의 말대로 춤을 추듯이 조금 더 가볍고 유쾌하게 인생을 대하는 것이야말로 이 삶의 굴레에 속한 포로로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선택일 것이다. 우리는 어차피 태어났고 기왕 태어난 김에 조금 더 즐겁게 삶을 영위하다 가는 것이 어떨까. 결국, 정답 따위 애초에 없을 테니까. 


+)이상이 내가 내린 결론이다. 그리고 며칠 뒤, 나는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 대한 구절을 읽게 되었는데 이런 제길, 내가 심각하게 정돈한 무언가가 바로 이것이었다. 역시나 앞선 수많은 훌륭한 선조와 선배들이 이미 인간들의 딜레마에 대해 앞서 고민하시고 다 정리를 해놨다. 

여기서 교훈을 얻는다. 혼자 삽질하기 전에 책이나 더 읽자.

이전 12화 내 인생에 악플은 당연한 것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