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대삶 Oct 30. 2022

 당신의 시간선은 언제인가요?

과거-현재-미래

인간의 시간은 크게 세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과거, 현재, 미래가 그것이다.

나를 포함한 모든 인간은 현재에 머무르고 있다. 그러니까, 그들의 육체는 확실히 그러하다.

그러나 그들의 영혼과 정신도 과연 그럴까?

당신은 과연 현재에 머무르는 사람인가?

지나간 과거에 안주하거나 집착하고, 오지 않은 미래를 두려워하거나 기대하며 정작 현재를 그저 그렇게 흘려보내고 있지는 않은가?


나 예전에는 정말 잘 나갔는데. 헤어진 애인 생각에 아무 것도 못하겠어. 어릴 때 놀림 받은 걸 아직도 악몽으로꿔. 오래 전 돌아가신 부모님을 못 잊고 매일매일 울어.


무슨무슨 일이 일어나면 어떡하지? 외롭게 늙어 죽으면 어떡하지? 부자가 되고 싶고 성공하고 싶은데 왜 난 남들처럼 성공하지 못하는거지? 


분명 어디서 많이 본 이야기들 아닌가?

우리가 혹은 내가 매일매일 반복해서 되뇌는 생각들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럴 때마다 현재를 벗어나, 과거와 미래라는 존재하지 않은 시간선을 헤매고 있다. 본인의 육체와 현실, 현재를 두고 한 눈을 파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재를 살고 있지 못하다. 크고 작게 현재를 회피해 과거와 미래로 숨는다. 혹은 그것에 집착하고 얽매여 있다. 왜냐하면, 마치 토끼굴에 머리를 박고 있으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니 자신이 안전하다 믿는 어리석은 토끼처럼, 현재를 외면하거나 유예시키는 것이 이따금 편하기 때문이며, 과거 혹은 미래에서 온 불안과 두려움에 현혹되어 자기 연민에 빠지는 게 현실에 충실하게 사는 것보다는 덜 무섭기 때문이다. 


이러이러한 이유가 있으니 나는 가엾고 불쌍하며 내 탓이 아닌 재난으로 이한 피해자이니 주저 앉아 현실과 주변, 남을 탓해도 된다고 자기 위안을 하면 조금이나마 본인이 감당해야하는 혹독한 현실을 외면하는 게 가능해진다. 듣기만 해도 암담해지는 심리가 아닌가. 물론 이런 자기 위로가 항상 한심하고 나쁜 것만은 아니다. 고통의 바다라는 삶을 항해하는 인간이 어찌 매분매시 강한 전사일 수 있으며 지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적당하고 적절한 자위 행위는 당장의 태풍에서 몸을 숨기고 숨고르기를 하기에 필요하다. 나쁘고 불필요한 감정은 없다. 긍정적 부정적 감정이란 것도 따지고보면 호불호에 따른 분별에 지나지 않다. 단지 지나치냐, 적당하냐의 차이에 불과할 뿐이다.


문제라면, 마약성 진통제에 의존하듯 지나친 회피와 안주는 곧 정신을 병들게 한다는 것이다.

당신이 머무르고 살아가야 할 곳은 현재다. 이미 지나가고 흩어져버린 과거나 존재하지도 않는 미래가 아니라. 이 점을 분명하게 인지하라. 당신이 잠깐 한눈을 팔거나, 너무 힘이들어 잠시 휴식을 위해 과거를 더듬으며 위안을 얻거나 과거로부터 교훈과 자기반성을 시간을 갖는 것도, 화창한 미래를 상상하며 현재를 살아갈 기운을 얻는 것도, 유비무환의 자세로 미래에 닥칠 일들에 대해 미리 대비를 하는 것도 괜찮다. 아니 외려 훌륭한 자가 치료다. 하지만 타임머신을 타고 간 시간 여행은 그저 여행일 뿐이다. 당신은 이 곳으로 돌아와야 한다. 반드시. 이것이 잠깐의 숨고르기이며 여행이라는 걸 잊어서는 곤란하다. 


현재를 살아라!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지만 계속해서 반복한다. 현재를 살아라, 반드시! 당신이 오늘을 충분하게만 살아도 과거의 잔영은 당신을 덜 괴롭힐 것이며 미래의 불안도 당신을 찾아오지 못한다. 충실하고 사랑이 넘치는 오늘이 곧 그대가 원하는 미래가 되어 갈 것이다. 너무도 흔한 발언이 아니냐고? 우습게도 삶의 진리는 우리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것들이다. 길가의 흔한 표지판이 그곳에 존재하는 건 이유가 있는 셈이다. 당신이 필요할 때 보라고 그곳에서 내도록 서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현재를 살아야하는가.

지금 당장 당신이 느끼는 기분과 감정, 오감, 오늘 하루 하게 될 것들을 상상하고 느끼고 기록해보라. 간략한 낙서 같은 일기도 좋고 사진도, 그림도 짧은 메모도 좋다. 뭐든 오늘의 당신을 기록하고 충실하게 몰입하고 느껴라. 예컨대 오늘 아침 마셨던 커피의 향, 길거리를 걷다가 마주친 길고양이, 매일 보는 가로수의 잎사귀들이 바람을 맞아 어떻게 움직이는지, 내가 무심코 하는 습관과 행동들을 새삼스레 관찰해본다든지, 아주 사소하게 지나치는 모든 것들을. '나'란 인간을 잘 관찰해보면 나오는 것들이 무궁무진 많다. 이렇게 다채롭고 풍성했던가 싶을 정도로 세세한 것들을 하나하나 매만지고 느껴보라. 지금 당장, 내 살갗에 닿는 것들, 나의 혀에 와 스며드는 것들, 뺨을 스치는 바람의 세기, 머리 위로 펼쳐진 하늘의 빛깔까지. 당신을 중심으로 한 세계는 같아보여도 매일매일이 다르다. 이것이 영화라면 엄청난 자본이 투자된 블록버스터다. 당신 자신을 트루먼쇼의 주인공이라고 상상해보라. 세상에, 당신이 매일 느끼는 이 자연스럽고 거대한 세상을 연출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인력과 특수효과가 들어갈지 상상이나 가는가? 그렇게 여기자면 당신의 얼핏 따분하고 지루하며 벗어날 수 없던 현실도 흥미진진한 서사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당신도 그렇다.


당신이 오늘 누리는 아주 작은 것들에 감사를 느껴라. 오늘따라 햇살이 따뜻할 수도 있고, 하늘이 유독 예쁠 수도 있다. 인도의 포장이 반듯하게 나서 편하게 걸을 수도 있는 것도 좋은 일이다. 오늘따라 나온 급식에 좋아하는 음식이 나올 수도 있고 날씨가 추워져서 좋아하는 코트를 입을 수 있는 것도 썩 근사한 일이다. 마침 거울에 비친 당신의 이가 유독 고르다면 그것도 좋은 일이고 앞을 볼 수 있는 시력과, 손가락 다섯개씩 붙어 있는 것도 다행한 일이다. 이것 또한 진부하다하여 듣기 싫다 할 수 있겠지만, 내가 지금 누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다. 지금 현재는 별거 아니어도 오십년 후의 늙은 당신에게는 아쉬운 하루 일수도 있는 것이다. 내일보다 젊은 청춘의 축복을 아직 누리고 있는 것도 행운이다. 찾아보면 나를 이루는 것들 중 썩 괜찮은 것들이 우수수 나올 것이다. 아무 것도 없다고? 그럼 더 찾아보라. 분명히 존재하지만 당신의 눈이 과거나 미래에 있으니 분명히 보지 못하는 것일테다.


당신은 본인의 시각과 시력을 현재의 도수에, 자기 자신에 맞게 맞출 필요가 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면 너무 멀리, 높이 보는 것이다. 혹은 뒤를 보느라 앞을 못 보는 것이다. 


자, 지금의 당신에게 지금까지의 이야기들이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린다면, 우리의 거리가 아직은 멀다는 증거다. 나는 현재의 시간선에서 머무르고 있는데 당신은 아니라는 얘기니까. 좀 더 가까이 붙어 앉아보라. 잠깐이 어려운가? 분명 당신에게도 나쁜 이야기가 아닐텐데. 


좀 더 와닿고 현실적으로 이야기할 수도 있다. 현재를 살려면 불필요한 것들을 정리하는 방법이 수월하다. 예컨대 가장 흔한 방법으론 과거를 정리정돈하는 것이다. 마치 하루를 시작하기 전 이불을 정리하고 방을 청소하는 것처럼, 계속 내 안에서 올라오는 과거의 잔재가 있다면 마주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어린시절 놀림당하고 괴롭힘당하던 일이 당신을 계속해서 수치스럽게 괴롭힌다면, 맞아, 난 그 당시 너무 억울하고 창피했어, 본인이 느끼는 감정을 그대로 인정하고 항복하라. 너무 고통스럽다면, 잘잘못을 따지지말고, 누구의 탓도 하지 말고 우선 당시의 어린 자신이 느꼈던 감정을 수용하라. 창피하고 수치스럽다고 그 아이를 당신마저 외면하지 말라. 당신안에 아직도 웅크려 있는 그 어린 아이가, 당신마저 외면한다면 얼마나 서럽고 외롭겠는가. 있는그대로 그 아이에게 공감하고 안아주어라. 당신이 은연중에 당시의 상황과 스스로를 수치스러워 회피하고 감추고 아무 일도 아닌 척 시치미를 때면 그 아이는 더 서러워 나를 봐달라고 계속 당신을 쫓아올 것이다. 그래서 괴로운 것이다. 


자기 연민을 할 거라면 제대로 하라. 진정한 자기 연민이란, 당신 자신을 긍정하는 것이다. 상처 받고 실패하고 어리석고 모자란, 과거의 자신을 안아주고 위로하고 인정하고 치료하라는 얘기다. 그 아이를 보듬고 이해하고 격려하라는 것이지, 무조건 '내 안의 작은 아이'가 불쌍하고 매사 도와주고 업고 다녀야할 금치산자로 과보호하고 그 감정에 취하라는 뜻이 아니다. 한 아이를 양육하는 부모상을 생각해보라. 그 아이가 다치고 잘못하고 실수한 것을 경청하고 자기 성찰을 이끌어내고 그러함에도 너를 사랑한다고 이야기하는 부모와, 무조건 어화둥둥 감싸안고 그 애가 흙이라도 다을라 치면 큰 일 날 것처럼 세상 만사 모든 게 적이고 불안이고 자기 아이가 무조건적인 피해자라고 하는 부모, 둘 중 누가 더 건강해 보이는가? 아이를 기르는 부모처럼 자신을 돌보라는 뜻이다. 부정적이고 오염된 자기 연민말고 긍정적인 자기 연민을 하라. 덮어놓고 불행에 취하는 건 마약과 다를 바가 없다. 계속 그 사이클에서 벗어나기 힘들어질테니까. 불행에 취하지 말고 불행을 똑바로 응시하라. 남탓, 환경 탓, 증오, 전부 부질 없다. 그리해서 과연 나아지는 것이 있는가? 없다. 고통이 증가하고 반복하고 계속될 뿐이다. 


당신을 괴롭혔던 것들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다. 시간이 흐르며 마모되고 없어졌다. 현재를 실질적으로 침범하고 있는 일이 아니라면 그것은 당신의 안에만 존재한다. 왜 본인이 먹이를 주고 가둬두며 내도록 살려주고 있는 괴물에게 위협을 느끼고 분노하며 원망을 하는가. 그 괴물의 수명을 늘려주고 있는 것이 본인이면서 말이다. 그 괴물을 처분하고 내면의 방을 청소하는데 성공한다면, 당신은 생존자이고 승리자이다. 당신이 이겼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든 간에, 최종적인 승리자는 당신이다.


반면 과거의 영광에 취해 있는 자라면, 길게 말하고 싶지 않다. 정신차려라. 그래서 현재의 당신도 그 영광을 누리고 있는가? 계속해서 오늘을 살며 성장하고 있는가? 영혼의 성장판이 닫혔다면 당신의 과거가 슈퍼맨이든 아이언맨이든 당신은 그냥 현재의 당신에 불과하다. 현재의 자신을 받아들이고 현재를 살아라. 당신이 오늘 만나는 이들은 오늘의 당신을 만나 대화를 해야 할테니 말이다.


그럼 미래를 사는 이들을 보자. 사실 나도 몇년 전만해도 이 유형에 해당되었다. 현재의 나보다는 내가 미래에 증명하고 해낼 것들에 더 관심이 많았다. 미래를 기대하고 그것을 해내고 싶어서 안달을 내며 달려가기 바빴다. 그러다 나를 다 소진하고 나서야, 혹은 방향성적인 혼란이 오고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내가 환상을 쫓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이 얼마나 흔하고 범하기 쉬운 실수인지. 미래를 향한 무분별한 기대와 야망, 성실하게 있는 현재를 사는 것은 참으로 한 끝차라 할 정도로 겉보기엔 그리 틀리지 않아서 구분하기가 마땅치 않다. 본인 내면을 수시로 점검하고 나와의 대화를 충분히 나누지 않는다면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친다.  


미래와 현재를 제대로 구분하고 싶다면,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다. 현재의 당신이, 오늘의 당신이 충만하고 건강한지를 살펴라. 미래를 위해 오늘의 내가 얼마나 소모되고 있는 지를 봐야한다. 당신 주변의 가족과 친구와의 관계가 원만한지, 오늘의 수면패턴과 나의 낯빛이 괜찮은지, 식사는 잘 하고 오늘 하루 몇번이나 진심으로 웃고 내 소중한 사람들과 대화를 하고 내면의 감사를 느꼈는지 살펴보아라. 내가 집착하고 원하는 미래가 있는가? 혹은 그런 미래가 올까봐 두려운가? 현재를 충실히 사는 자에게 전자는 와도 좋고 안 와도 좋은 것이며 후자는 부질 없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어차피 미래를 한낱 인간이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계획과 목표를 세우되, 집착하지 말라.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것이 미래다. 이길 수 없는 것과 싸우려 하지 말았으면 한다.  오지 않은 미래의 불안에 쫓겨 현재를 상실하지 말라. 그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오늘을 살기에도 인간의 24시간은 벅차고 풍족하다. 부디 당장 나를 둘러싼 반짝이고 귀한 것들을 외면하거나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 당신은 그것들을 누릴 자격이 있다.

이전 14화 감정 방정식(a+b=c)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