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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삶 Oct 30. 2022

당신은 분노의 주인인가, 노예인가?

분노하는 사회

타닥 또 타오르는 저 불씨

기름에 닿기 전에 먼저 집어삼키네

필시 휩쓸려가겠지 예 예 음

오늘의 선수 입장하시네 건수를 yeah

물기 시작하면 둥둥둥 동네북이 돼 둥둥둥

툭툭 건드네 괜시리 툭툭 yeah

반응이 없음 걍 담궈버리지 푹푹 yeah

진실도 거짓이 돼

거짓도 진실이 돼

이곳에선 모두가 도덕적 사고와

판단이 완벽한 사람이 돼 웃기시네

분노? 물론 필요하지

타오를 땐 이유가 있으

어쩌면 우리의 역사지

그게 세상을 바꾸기도 하지

But 이건 분노 아닌 분뇨

뭐가 분노인지 you know?

분노인 척하며 죽여 진짜 분노

질려버린 수도 없이 많은 people

넌 나만 죽이는 게 아니야

똥 밟는 게 익숙해 우리야

무감각해진 저 사람들 봐

분뇨, 무관심 너넨 팀이야

나는 욱해 욱해(중략)

나는 악의에 가득 찬 분노에 분노해(중략)

나는 꺼져야만 했던 분노에 분노해(중략)

재가 될 때까지 그래 욱해라 욱(중략)

부러질 때까지 그래 욱해라 욱(중략)


-방탄소년단 욱- 의 가사


*


분노란 무엇일까. 화를 낸다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일상에서, 우리의 내면에서 수시로 들끓는 마그마인 분노와 화를 모를 수가 있을까. 

문득, 마치 술에 취한 것처럼 이성을 잃게 만드는 분노라는 감정의 본질이 궁금해졌다.

분노는 무엇이기에 우리를 이토록 도탄에 빠뜨리고 나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고 잔인하고 무섭고 고통스러운 사건사고를 일으키는 걸까. 또한, 분노란 것이 무조건 나쁜 것일까?


감이 오지 않아 하루 종일 멍하니 앉아 있다가 주변인들에게 묻기 시작했다. 


어떨 때 가장 화가 나? 어떤 상황에서 넌 분노하니?


나의 질문에 많은 이들이 한동안 가만히 고민하다가 하나 둘 답을 내놓았다.


나를 무시할 때? 

얼마 전에 후배가 내게 함부로 굴었을 때 정말 불쾌했어. 

눈치 없이 굴 때 정말 싫어.

무례한 것. 선 넘을 때 화가 나.

차별 받을 때. 지역 비하라던가.

내 뜻대로 일이 안 될때 너무 화가 나.


여러 답변을 들었다. 하지만 그들을 통해서 나는 실마리를 얻었다. 사람들은 보통 욕망이 저지 당하거나 존중 받지 못할 때 분노를 느낀다. 즉, '본인의 자아가 위협을 느낄 때 올라오는 공격적인 방어'가 분노가 아닐까, 나는 정의내렸다. 그리고 사람에 따라 이는 조금씩 다르지만 본질적인 형태는 같다. 

나의 경우, 나는 화가 나는 것 자체가 드물다. 낙천적인 편에 속하고 스트레스를 푸는 나만의 소소한 습관들이 있다. 하지만 이런 나도 종종 불쾌감을 느끼고 분노할 때가 있는데, 역시 이 또한 기본 매커니즘이 같다. 무례한 사람들, 염치를 모르고 비겁하고 비열하게 구는 사람들, 본인만이 정답인 줄 알고 기고만장하여 오만하게 구는 이들에게 친절하게 굴기란, 나에게는 너무도 어려운 일이다. 


최근의 어떤 일에서 격분하고 나조차 놀라서 곰곰히 내가 왜 화가 났나 되짚어보니, 결국 나의 자부심이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밖에도 상대방의 회피적인 태도, 방어적인 공격성 등의 여러 조미료가 있긴 했지만 결국 내가 자극 받은건 내 자아가 견고하게 쌓아올린 자부심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나는 아마도 내가 쌓은 것들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모양이다. 그게 쓴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조금 귀엽기도 하다. 


개개인의 에고와 자아란 정말이지 신비롭고도 단순한 성질의 것이다. 강렬하고 고집스럽지만 외려 그것이 더 연약할 수록 파열음이 강하다. 그것은 강인한 영웅의 얼굴을 하기도, 예민하게 곤두선 아이처럼 날카롭게 반응하기도 한다. 우리는 곧잘 이 가면에 휘둘린다. 하지만 명심해야 한다. 분노는 내가 아니다. 이 감정에 속아서는 안된다. 순간적으로 튀어나온 반응따위가 우리를 결정짓게 나둬서는 아니된다. 


분노란, 생태계에서 천적을 마주했을때 돌출되는 긴장과 아드레날린처럼, 신체에 질병이 침범했을 때 치솟는 열과 같은 것이고,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태어난 여러 방어기제 중 하나의 흔적일 것이다. 우리는 이따금 싸워야할 때가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나친 열병은 병균을 태우다 못해 우리의 신체까지 홰손시킨다. 이러한 독감은 면역력이 취약할 때 보통 찾아온다. 여기서 말하는 면역력이란 불안도와도 일맥상통한다.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다룰 만한 여유가 부족하고 불만족과 콤플렉스, 피해의식, 오염된 자기연민이 있다면 정신 면역력이 더 낮아져 '열병'이 자주 발생한다.


분노는 동기여야 할 뿐, 그것이 과정이고 결과가 되면 안된다. 분노를 다스리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는 분노의 원인이 무엇이며 내 자아의 어느 부분이 상처 받아서 나온 것인지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분명 분노는 새빨간 경고 신호다. 나의 정신 면역력이 무너졌거나 이상이 생겼거나, 내 자신을 돌아볼만한 의미가 생겼을 때 분노가 발생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 분노가 인다면 이를 반갑게 맞이해야한다. 한층 더 내면적으로 성장할 계기가 왔다는 뜻이니까. 내면의 내가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소리치고 있는 것이다!


분노에 휩쓸리지 말라. 분노에 타지 말라. 분노에 지지 말라.


하지만 점점 우리는 분노에 지는 것처럼 보인다. 하루걸러 들리는 끔찍하고 슬픈 사건사고들, 인터넷에 만연한 악플과 부정적인 신호들을 보라.


이 사회에는 분노가 만연하다. 마치 사방이 적인 것처럼 모든 것에 화를 내는 것만 같다. 해서 나는 한반도가 새빨간 화염에 휩싸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하지만 개개인적으로 보면, 그들을 자극한다고 하는 것들은 대개 그런 의도가 없다. 하지만 그들은 화를 낸다. 이 사회에, 다른 성별에, 또다른 성향과 가치관에, 다른 세대에, 부모 자식간에, 심지어 지나가는 죄없는 길고양이에게도.


나는 이 끔찍한 열병이 불안과 공포의 비명으로, 사랑에 대한 괴로운 갈구처럼 들린다. 


나를 사랑하고 관심을 달라고, 내가 지금 너무 아파서 미칠 것 같다고.


그런 생각이 들때면 어쩔 수 없이 참담하고 슬픈 감정에 휩싸인다. 


때론 그들은 화를 내면서도 본인이 왜 화를 내는지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이따금 적절한 변명거리 하나만 있다면 길가의 가로수에도 화를 낼 수 있을 것만 같다. 그것은 자학과 같은 화고 화풀이다. 저것이 나를 해치고 괴롭히고 공격하고 있다고, 확신하며 내지르는 고함과 빈정거림, 모욕들은 대상이 파괴될때까지 멈추지 못할 광기와 같다. 무엇을 위한 분노인가. 나는 왜 그것이 자기혐오와 얼핏 닮아 보이는 지 모를 일이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그 부질 없는 화들에 눈쌀을 찌푸리다가도 가엾어지고 슬퍼진다. 분노는 상대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부터 태운다. 스스로를 불사르는 그것들은 그렇기에 강렬하고 파괴적이다. 해서 그것의 유무의미와 상관없이 쌓이고 쌓여 사회적 문제가 되고 큰 흐름에 영향을 미친다. 하여 나는 이것이 남 일 같지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분노는 중요하다. 분노는 아껴야 한다.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분노는 거대한 화염처럼 역사의 줄기를 바꾸어 왔다. 동학 농민 운동, 프랑스 혁명, 전태일 열사의 분신, 모두 위대한 분노다. 낭비되는 감정은 없고,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감정도 없는 법이다. 분노는 우리를 지키기 위한 자극제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들, 그 기반에 수 많은 분노의 거름이 쌓여 있다. 분노는 관계이며 사랑이다. 나를 기꺼이 태우는 절규고 호소이다. 이 슬픈 불을 어찌 모른다 하겠는가. 


이 사회에 이토록 분노가 많다는 것은, 면역력이 낮아 졌다는 것이고 어딘가에 전반적인 문제가 쌓이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안타깝고 한 편으로는 두렵다. 이 열병이 나을 수 있을까. 어디서부터, 무엇부터 잘못되었을까.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지나친 경쟁사회, 소멸해가는 지방도시, 남녀갈등, 세대 갈등, 갈수록 낮아지는 출산율, 묻지마 살인....


분노가 무차별적인 증오가 되어갈까 두렵다. 우리는 이미 이 세계에 눈 없는 증오에 먹혀 끝 없는 분쟁과 전쟁으로 고통 받는 이들을 알고 있다. 


방탄소년단의 욱이라는 가사가 지금 생각하는 바와 너무 같아 글 초반에 옮겨 두었다. 눈 없는 분노의 부질 없음, 무분별한 분노에 질리고 무감각해진 사람들, 낭비되는 귀한 분노에 분노한다는 메세지. 


사회에 넘쳐흐르는 분노를 어찌 다뤄야 할지 나는 아는 바가 없다. 나는 훌륭한 학자도 정치인도, 기업인도 아닌 흔하고 널린 글쟁이에 불과하다. 그저 조금이나마 사람들을 위로하고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좋은 글을 써낼 작가로 살아갈수 있기를, 부디 그럴 수 있기를 바라며 보잘 것 없는 글을 써갈 뿐이다. 


하지만 민초 중 하나인 나라도, 수많은 꽃 중 하나인 당신이라도, 딱 한 명이라도 분노를 함부로 취급하지 않는다면, 아주 작은 시작이라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당신의 분노가 과연 정당하고 무조건적으로 옳은가? 당신의 혐오와 일방적인 경시가 어떤 절대적인 진리가 될 수 있다고 보는가? 당신은 왜 분노하는가? 실재로 그 대상에 분노한게 맞기는 한가? 당신은 긍정적이고 실효성 있으며 실리적인 관계와 결과를 위해 분노를 옳바르게 사용하고 있는가? 당신은 어떤 사람이고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이 상황, 이 순간에 분노하는가?  분노에 휩쓸리는 게 아니라 그의 고삐를 잘 얽매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을 단 한 번이라도 스스로에게 한 적이 있는가?


부디 당신의 화를 좀 더 귀하게 여겨주기를 바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길, 노여움은 가끔 도덕과 용기의 무기가 된다고 말했으며 해리엇 러너는 분노는 귀담아들을 가치가 있는 신호라고 했다. 


당신은 분노의 주인인가 노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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