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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삶 Oct 01. 2022

감정 방정식(a+b=c)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싶다면 먼저 '나'와 대화를 나누라

요즘 인간관계와 소통, 그리고 이를 위한 나의 언어의 깊이와 향, 습관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잦다.


나는 과연 함께 하고 싶을 만큼 경청을 잘 하는 가? 또한 아름다운 언어를 쓰는 사람인가? 타인의 예민한 부분이나 불편함을 세밀하게 감지하고 이를 피하거나 배려하는 사려깊음이 있는가? 그들에게 있어 만나고 난 뒤 잔향이 향긋한 인간에 해당되는가.


인복이 좋은 편에 속하나 사실 모르겠다. 나는 나이기에 또한 나를 새로히 만나 차 한잔 마시며 대화를 나룰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다른 누군가가 되어 나란 인간과 인사를 나누고 함께 식사 정도는 해야 어느 정도 확실한 감이 오지 않을까-이 장면을 상상해보자니 퍽 흥미롭다. 죽기 전에 한 번쯤 그런 기회가 온다면 좋겠는데 당연히 불가능하겠지?-.


비교적 완만한 인간관계가 좋겠지만, 낯선 두 사람이 더 가까워지고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따금 충돌이 불가피하다. 진정한 이해와 친함의 과정에서 필수불가결하며 어쩔 수 없다. 우리는 이토록 다르기에 당연하게도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부딪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나는 이런 충돌의 과정이 항상 피로했다. 내가 차라리 맞추거나 피하고, 이 둘이 불가능할 만큼 내 평생을 함께할 관계라면 수고롭게 최선을 다해 대화하고 싸웠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나의 민감한 부분이 건드려질 때는 화를 삭히며 어떻게든 상대방을 이해하려 애썼다.


'왜 저런 말을 할까.'

'어떤 사고방식으로 저렇게 행동하는 거지?'

'내가 모르는 이유가 있는건가?'


이렇게 분석적으로 다가가서 살피고 공감하며 결과물로 대략적인 약도가 나오면 마음이 편해지면서 상대를 이해하기도 쉬웠다. 이런 감각적인 통찰력은 어쩌면 나의 장점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그 방향성이 바뀌었다.


마찰이 생기고, 화가 났다면, 상대를 이해하려 하기 전에 나 자신을 살피고 이해하기로.


당연하게도, 타인의 언행을 이해하려 하기 전에 이 상황의 원인을 내 안에서 찾는 것이 옳지 않을까?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돌리며 겸손을 가장하라는 말이 아니다. 부정적인 감정이 일어났다면, 그 감정이 솟구친 내 안을 먼저 정결히 하라는 얘기다. 그래야 뭐든 시작할 수 있으니까. 저녁 가족식사를 위해 깨끗하고 깔끔한 주방에서 요리를 시작하는 게 좋은 것처럼 말이다. 


화가 난다. 그렇다면 왜 화가 났는가? 분노, 슬픔, 우울함, 모든 감정에는 원인이 있고 그것은 바깥이 아닌 내 안에 있다. 내면의 내 것이 특정한 상황을 만나 밖으로 돌출된 것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본인은 가만히 있는데 외부의 무언가가 자신을 건드렸다며 이유를 밖에서 찾는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방향이다. 같은 상황이라 한들 사람마다 분노하고 불쾌해하는 시점과 지점이 다르다. 나에게는 참을 수 없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별 거 아닌 일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차이는 어디에서 존재하는가? 나의 내면이다. 


내가 a라서 b를 만나 c(분노)가 되었을 뿐, 상대가 b라서 무조건 c가 나오지는 않는 것이다. 

대상이 a가 아닌 d라면 b를 만나면 f(지루함)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a(나)+b(상황)=c(분노)


나는 이것을 감정 방정식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a(나)가 미지수이고 b(상황)과 결과값(c)만이 명확한 대개의 경우, 우리가 해야될 것은 무엇일까.

아주 당연하게도 미지수인 a를 계산하는 것이다. 학교에서 계산했던 수 많은 사칙연산처럼 아주 간단한 논리다! 이해되는가? 이건 아주 분명한 사실인데도, 우리는 아주 많은 실수를 저지른다. 답은 바깥에 있고 상황과 환경이, 상대방의 잘못으로 내가 이토록 불안하고 화가 나고 슬프다고 말이다. 감정이 올라올 수록 우리는 냉정해져야 한다. 감정은 소중한 것이지만 감정에 매몰되는 건 상황 해결에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는다. 


우선 미지수인 a값을 계산하고 나면, 계속해서 나 스스로를 향해 why를 던지다보면 내가 유독 불쾌했던 이유가 나온다. 그것은 타당하기도 하고 비논리적이며 때론 유치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걸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외려 이런 일이 생길 경우, 스트레스 상황이 아닌 기회로 여겨야 한다. 내 내면과 무의식 안에 쌓인 찌꺼기와 부정적인 것들을 끄집어내 청소할 기회, 내가 나 자신을 더 잘 알고 이해하며 친해질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타인과 친해지기 위해 갈등을 빚고 화해하는 것처럼, 내 스스로와도 친해질 수 있다. 나와 친해지는 것이 선행되어야 타인과 바깥 세상과도 친해질 수 있다. 우리는 종종 이 번거롭고 수치스럽고 낯부끄러운 핵심 작업을 건너뛰거나 외면하기에 아주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심리적 문제들을 큰 병으로 키우거나 후일 약으로 해결하려 한다. 


감히 말하건대, 나와의 대화는 인간의 본분이다. 우리는 이 대화를 하기 위해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더 잘 알기 위해서, 더 나다워진 나의 모습으로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서.  '나'가 세상과 연결되는 순간 일어나는 그 독특한 파장과 아름다운 오오라를 만끽하기 위해서. 그것은 오직 세계에서 유일하게 '나'만이, 당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 어떤 누구도 당신을 대체할 수는 없을테니까. 


이것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타인을 이해하려함은 오만함이며 자기 회피이다. 엉망으로 뒤섞인 파레트로 수채화를 그리겠다는 객기다. 기실 나는 이것이 퍽 기만적이며 자기 연민에 찬 행위가 아닌가 생각해보곤 한다. 


저 사람을 이해하고 싶어. 넌 왜 그렇게 행동하는 걸까. 왜 내게 그렇게 행동하지?


말은 좋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무턱대고 타인을 이해하려함은 현상의 원인을 밖에서 찾는 행위 일 수도 있다. 결국 내 안에서 기어나온 분노라는 개를 왜 불러냈냐고, 불러서 어쩔 생각이냐고, 이 개가 너를 무는 것도 네 탓이라고 하는 형국이다. 기실, 대부분의 '나에게 무례한 사람들'은 내게 관심이 없다. 내 개의 이름이 분노라는 것도 안중에도 없고 알지도 못한다. 그들은 보통 아무 생각이 없다. 그저 생긴대로 말하고 행동하고 걷는 것에 불과하다. 그 모양이 나와 맞지 않을 뿐이다. 그러니 그런 그들에게 '넌 왜 그렇게 행동해?'라고 묻는 건, 넌 왜 그렇게 생겼냐고 묻는 것과 같을 것이다. 


미지수인 a값을 정확히 계산하고 나면, 대개의 경우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답이 나온다. 내가 이러이러한 것이 싫고(사실 확인), 그것이 싫은 이유는 이러이러하기 때문이고(원인분석-사실 이 단계에서 꽤 많은 분노 에너지가 희석된다), 결과값이 도출되고 나서도 이것은 내 개인적인 호불호 혹은 나의 가치관에 어긋나며 향후 관계에도 해가 된다는 결론이 난다면, 이에 대해 상대방에게 정중하게 사실을 알리고(사실 적시) 공손하게 부탁하면 대부분의 경우 해결이된다. 이미 두 번째 단계에서 나의 부정적인 감정이 많이 해소된 상태이기에 마지막 행동에 들어설 때는 좀 더 냉정하고 사회적으로 처세할 수 있게 된다. 혹은 분노 표시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거나, 내 감정이 나의 안에 잠들어 있는 원인들로 인한 과민반응이라는 것을, 어쩌면 내 감정의 원인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 만으로도 다른 것들은 뭐든 괜찮아질 수도 있다. 


현상을 파악하게 된다면 우리의 선택지는 훨씬 간결하고 산뜻해진다. 우리의 삶을 관통하는 지혜와 진리가 의외로 볼품없을 정도로 간단한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다. 원래 인간의 삶은 단순하다. 우리가 지나친 감정 이입과 의미 부여로 덕지덕지 칠해 복잡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타인을 그 정도로 심각하게 들여다보고 이해할 필요도 없고 그럴 수도 없다. 그저 상대는 세모고 너는 네모일 뿐이다. 다름을 받아들여라. 그 지나친 연결 욕구와 어떻게든 네 방식대로 고치고 해결하고 싶어하는 치기를 견뎌라. 그 간단한 것을 못해서, 부정하고 부정하다가, 결국 상대방이 구제불능의 골칫거리거나 애초에 타고난 하자품인 것마냥 매도하고 분개하지 말라. 무의미함이니. 


 지나친 감정이입을, 정도 이상의 몰입이 일어나는 순간, 한번쯤은 스스로에게 질문해봐도 좋다. 이것은 미지의 낯선 것을 향한 순수한 경이와 경탄의 몰입인가, 아니면 연못에 비친 제 얼굴에 취한 어리석은 나르키소스처럼 자기 자신을 투영한 타인에 대한 관심인가. 대상에 대한 정도 이상의 일어나는 감정은 거울에 대고 화를 내거나 웃고 웃는 것일 수도 있다. 아니 퍽 그럴 확률이 높다. 


모든 인간은 타인이라는 거울에 매혹된 나르키소스다. 인간이 가장 관심을 가지고 매력을 느끼는 건 결국 자기 자신이다. 어떤 시대, 세대, 어떤 나라이건 '공감'이 가장 큰 무기인 이유도 이 때문이다. 사람은 자기 자신이 가장 매력적이고 재미있으며 매혹적인 대상이다. 나와 닮고 같은 것에 관심을 가지고 나와 정반대의 것에 끌린다. 나와 달라서 이해할 수 없어 화가 나고 내가 마음 깊이 원하던 것을 쥐어주면 들뜨고 사랑을 느낀다. 결국 주체는 '나'다. 


나를 제대로 알게 되면, 결국에는 다른 모습을 한 또 다른 '나'인 타인이 궁금해진다. 나를 진심으로 존중하고 사랑하게 되면, 다른 이도 자세히 살피고 돌보고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이것이 나에게서 출발하는 건강한 이타성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대화조차 그렇다. 내가 어떤 사람이라고 떠드는 이와의 대화는 재미가 없다. 나에대해 관심을 가지고 진심으로 공감하고 나를 궁금해하는 사람과는 끝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주제가 '나'이기 때문이다. 해서 그 사람과 가까워지고 싶다면, 그를 마음을 다해 궁금해 하면 된다. 미지의 낯선 나라를 여행하는 여행자처럼, 어린 아이가 호기심에 차서 세상을 보듯이, 할머니의 옛날 이야기가 알고 싶어 발을 동동 구르듯이. 그런 자세를 가진 사람을 싫어할 이는 없을 것이다. 진심으로 경청하면 지루할 틈이 없다. 타인이 지루하게 느껴지는 건 당신이 그에게 완벽히 몰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매력이란 것은, 몰입하기 쉬운가, 그렇지 않은가로 나뉘는 차이에 불과할 수도 있다.


마치 아무 생각 없이 흘러듣던 클래식 음악을 막연히 지루하게 여기다가 음절 하나하나에 집중하며 몰입하면 그 풍부한 아름다움이 전신에 스며드는 것처럼, 사람도 그렇다. 나태주 시인의 오래 보아야,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사랑스럽다는 풀꽃이란 시의 구절을 기억하는가. 어쩌면 모든 인간은 연못에 비친 자신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수선화 한송이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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