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추구해야 될 개인적이고 고전적인 가치
분별력分別力 이란?
명사
* 1.
서로 다른 일이나 사물을 구별하여 가르는 능력.
* 2.세상 물정에 대하여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는 능력.
분별력이라는 단어를 처음 알게 된 건 제인 오스틴의 소설 덕분이었다. 당시 10대였던 나에게 ‘분별력’이란 건 어감은 물론이고 어딘가 촌스럽고 고리타분한 느낌을 주었다. 제인 오스틴이 18세기 영국의 소설가이니 2000년대의 청소년에게는 당연히 그럴 만하지 않았을까.
그녀의 오만과 편견을 비롯해 고전적이고 서정적인, 품위 가득한 인물들-물론 꼭 그런 것만 아니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은 풍자가 기본이니까-이 등장하는 로맨틱한 소설 속 주인공들은 항상 분별력에 대해 말하곤 했다. 명예를 손상시키는 행위는 해서는 안 되며 에티켓을 목숨처럼 여기고 흠 잡힐만한 언행을 해서는 안 된다고. 자기 절제를 못 해 본인의 천박한 욕망을 내보이는 인물들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하기도 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그 ‘천박한 사람들’은 그 탐욕 때문에 처지가 나빠지거나 권선징악을 받는다.
분명 그녀의 고전 소설들은 현대인이 보아도 재미있고 인간의 한 속성을 냉철하다시피 꿰뚫고 있다. 제인 오스틴의 시선은 인간이 넘지 말아야 할 선, 본인의 가치와 최소한의 품위를 잃지 않기 위해서 가져야 할 용기와 인내, 사람으로서 추구해야 할 도덕에 대해 말한다.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인 옛날의 가치관을 덜어내더라도, 그 핵심메시지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충분히 시사점이 있는 셈이다. 특히 가면 갈수록 뭐가 옳은지 그른지 헷갈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문명화되고 현명하며 동시에 복잡하고 혼돈스러운 이 시대에는 말이다.
최근들어 나는 가면 갈수록 이 ‘분별력’이라는 단어가 우리에게 필요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잠긴다. 단순히 도덕과 에티켓 따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규정한 오늘날의 분별력이란 우리 각자 개인의, 자기 자신만의 분별력이다.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 서로가 옳다며 명석한 두뇌와 수십 가지 학설과 증거, 화려한 언변으로 자기주장을 펼치는 정보 과잉 시대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고 어쩌면 이는 시작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당장 유튜브만 틀어도 한 가지 주제에 과도하게 많은 주장과 정보들이 있다. 전문가들도 많고, 인지도가 높으며 입담이 좋은 누군가의 말 한마디는 파급력을 가지고 사회에 큰 파장을 주기도 한다. 언젠가부터 뉴스보다 유튜브에 올라오는 취재 정보를 더 믿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뉴스는 공신력을 잃었고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넘치는 정보의 식탁에서 편식하여 특정 정보만 취득하고 있다. 심화되고 과대 포장된 정보, 부풀려진 이미지, 그로 인한 불필요한 갈등과 의심, 혐오. 과유불급이라고 하던가. 혼돈의 시대다.
다만 나는 이런 위기의식 속에서도 또 다른 가능성을 보았다. 다크 에이지가 있어야 르네상스가 있지 않던가. 이런 혼돈의 과도기가 지난 후에는 조금 더 나은 것, 혹은 기회가 찾아오지 않을까. 위기는 기회란 말이 있는데, 나는 참 이 말을 좋아한다. 내가 흔한 삶의 구렁텅이에 빠졌을 때 가장 위로가 되는 말이었고 내게 한 줄기 영감과 앞으로 더 나아갈 용기를 준 응원의 메시지이다. 삶은 결국 반복되고, 새옹지마라고 항상 비극이 계속되지도 희극만 있지도 않다.
그럼 이런 혼돈 속에서 우리는 어떤 깃대를 잡고 버텨야 할까. 이런 시대이기에 가질 수 있는 지혜도 있을 것이라 믿는다.
12가지 인생의 법칙의 저자 조던 피터슨 교수는 인간 사회와 정신을 크게 질서, 안정을 뜻하는 빛과 혼란, 창조를 뜻하는 혼돈으로 나눠서 묘사했다. 나는 이것에 큰 인상을 받았다. 혼돈을 가르고 그것에 가려진 내 두 눈을 다시 밝히기 위해서는 질서가 필요하다. 좀 더 정확하게는, 나의 인생과 나의 정체성을 보호하고 책임질 ‘나만의 가치관과 질서’말이다.
요즘 다들 한다는 비트 코인, 영끌을 놓치면 바보라는 소리에 생각 없이 있는 돈 없는 돈 갖다 부어 하루하루 뉴스만 보며 초조하게 말라 죽어가는 삶을 생각해보라. 여기에 당신만의 분별력이 관여한 흔적이 있는가? 여러 자료 조사와 나만의 사고, 투자관으로 돈을 투자했다면 뭐 그것은 당신의 자유니까,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하지만 투자에 대해 뭐 하나 제대로 아는 것도 없으면서 주변 분위기에 휘둘려 당신의 인생을 걸었다면 나는 당신을 동정할 생각이 추어도 없다. 그것이 잘 되든 안 되는 결과는 중요치 않다. 내가 비난하는 것은 당신의 무분별함과 무모함, 본인의 인생에 대한 무책임이다.
모든 사람들이 다 하는 거라고 당신에게도 그게 정답일 거라는 보장은 없다. 나의 소비 패턴과 내가 추구하는 금전관리, 삶의 형태, 나의 판단력,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고려해서 결정해도 부족할까 말까 한데 눈먼 양처럼 남들 시키는 대로 움직이다니. 그렇게 수동적으로 사고할 거라면, 그토록 쉽게 나 스스로를 방임하고 포기할 거라면 뭐하러 인간으로 태어났는가? 조수를 따라 헤엄치는 해파리가 당신보다는 자유로울 것이고 나무에 붙어 숨을 쉬는 이끼가 차라리 공기 한 줌이나마 지구 환경에 이바지할 것이다.
과격한 비난에 놀랄 사람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과도한 정보와 우리를 둘러싼 세밀한 사회체계 속에서 길들여져 자란 현대인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봐야 하는 비난이라고 생각한다. 이건 나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는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 세뇌되고 타인의 결정과 의사에 휩쓸려 그것이 마치 자기 것인 양 착각하는 실수를 종종 되풀이하기 마련이니까. 우리는 온 힘을 다해 주변과 세상으로부터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기를 써야 한다.
즉, 나만의 길을 걷기 위한 노선과 나만의 질서, 규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이 호감을 갖고 존경하는 학자가 어떤 학설에 대해 침을 튀기며 설교하더라도 경청하는 한편 그것에 대해 재해석을 해보거나 그 의견을 어떻게 하면 나에 맞게 받아들일 수 있는지 골몰해야 한다. 같은 정보라도 받아들이는 이가 누구냐에 따라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해석될 수도 있고 무가치한 휴지 한 조각이 될 수도, 가벼운 소식 하나가 인생을 바꿀 최고의 정보가 될 수도 있다.
이와 비슷한 일화를 나는 하나 알고 있다.
나의 외 증조할머니, 그러니까 나를 낳아주신 엄마의 할머니가 되시는 그분은 여인의 몸으로 집안을 일구신 여장부였다. 그녀는 대담하고 똑똑하며 기지가 있었고 사소한 정보도 귀담아듣고 본인에게 유리하게 활용할 줄 아는 판단력과 실행력이 있었다. 당시 지방은 같은 성을 가진 이들이 집성촌을 이뤄 모여 사는 경우가 많았는데 외증조할머니는 주변 지방과 마을의 모든 정보가 문중 집안 어른들의 입과 귀로 모여 오가는 것을 보고 자랐다고 한다. 시집온 집안도 바닷가와 논밭이 맞닿아 있는 집성촌이었고 남들은 그냥 듣고 흘릴 사소한 소식들이나 소문들을 귀담아들은 그녀는 장에 나가 질 좋은 멸치와 어류 등을 싼값에 많은 양을 구매했다. 그런 다음 바닷가와 멀어 신선한 어류를 구하기 힘든 내륙의 마을을 돌아다니며 적당한 가격에 그것들을 되팔았다. 어느 집안에 제사가 있다더라, 뭘 한다더라, 집집마다 도는 아낙네들의 소식들이 그 일에 도움이 된 것은 물론이다. 깐깐한 외증조할머니의 물건은 항상 상등품이었고 꾸준하였기에 점점 입소문이 나고 신용이 쌓였다. 나중에는 굳이 가지 않아도 사람들이 그녀를 찾았다. 홀로 시작한 소일거리가 나중에는 머슴 여럿을 동원해야 했다고 한다. 외증조할머니는 꾸준히 발품 팔아 번 돈으로 논과 밭을 조금씩 사들여 부를 축적했다. 덕분에 내 어머니의 어린 시절은 부유하고 풍족했다고 한다.
그녀를 그리워하며 들려준 엄마의 이야기를 들은 어릴 적의 나는 퍽 강한 인상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아직도 종종 강철처럼 강인하며 고집이 세고, 논 일을 앞에 두고 앉아 무심히 담뱃대를 물고 헤아리다 돌연 굽은 허리를 펴고 일어나 마을 내 쓸만한 장정들을 요령 좋게 구해 집안일을 해치웠다는 현명하며 당찬 여인의 거목 같은 뒷모습을 상상하곤 한다. 60년도 전의 아주 오랜 옛날의 이야기이니 마땅한 교육도 받지 못했을 그 조그만 여인에게서 어떻게 그런 기지와 용기가 숨어 있었을까. 손주들이 한 대 쥐어박혀 오거나 울상이라도 지을라치면 누가 우리 새끼를 건드리느냐며 호랑이처럼 변해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던 그녀의 더운 사랑과 책임감, 비상한 관찰력과 같은 것들이 외증조할머니를 그토록 강하게 변모시켰을 것이다.
아마 같은 조건에 있었다 해도 그녀와 같은 생각과 행동을 할 사람이 아니라면 그런 뜬소문들은 아무 가치도 되지 못하고 묻혔을지도 모른다. 외증조할머니는 사소한 무언가를 접했고, 생각하고 고민했으며, 가능성을 따졌고, 본인의 능력과 실행력을 고려하여 성공시켰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그녀가 얼마나 똑똑하고 대단한지에 대한 것이 아니다. 바로 강인하게 자신만의 생각과 계획에 확신을 가지고 밀어붙이는 강인함, 뚝심, 결단력과 용기와 같은 것이다. 여성에게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그 분은 알게 모르게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을 끝없이 고민했고 살면서 자기 자신을 지키는 데, ‘나 답게 사는 삶’을 방어하고 끝까지 그것을 실천하다 세상을 뜨셨다.
'나는 이렇게, 저렇게 살아야 현명한 것이다'. '이게 옳다'. '내가 옳고 넌 어리석으니 나를 따라라' 따위의 말을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런 오만한 말을 지껄일 정도로 나 자신이 뛰어난 인간인 것도 아니며, 설사 그렇다 한들 어떤 이가 타인에게 함부로 그런 주제넘은 말을 지껄일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당신의 삶은 당신의 것이고, 내 삶의 주인은 나밖에 없다. 당신의 배우자, 아이들, 낳아준 부모님도 감히 당신의 소유권과 주도권을 낚아채 갈 수는 없다. 그건 도둑질이다. 하지만 더 나쁜 건 싸워보지도 않고,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나 고민, 생각조차 하지 않고 나태하게 자기 결정권을 타인에게 양보하거나 떠넘기는 행위이다.
현대인으로서 게을러서 생각을 안 하는 건 기독교 7대 악보다 크나큰 죄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우리는 과거의 조상보다 배움의 기회가 넘치고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으며 인류 역사상 가장 분명한 인권을 보장 받고 있다. 환경이 받쳐주는데 포기하는 건 그저 어리석음이요, 나태이다.
물론 넘치는 정보 속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는 건 어렵고 성가신 과정이다. 나보다 똑똑해 보이는 누군가의 말만 듣고 행동하는 게 사실 퍽 쉽게 느껴진다. 가끔은 타인의 그러한 능력이 삶을 꾸리는 데 필요하기도 하다. 그러나 그들의 조언과 생각, 세계관이 당신을 정도 이상 지배한다면 그것은 위험하다. 그건 참고가 아닌 따라 하는 것에 가깝다. 흉내 내는 삶은 비루하다. 얻을 건 얻고 버릴 건 버리고 취할 건 취하며 내가 좋아할 나, 내 취향 저격인 나를 세공해 나가야 한다.
‘우리집 소’ 같은 경우, 걔가 하는 짓거리가 항상 마음에 드는 건 아닌데 고집불통에 쓸데없이 생각 많고 방 안을 순두부마냥 퍼져서 데굴데굴 굴러다니지만, 더 나은 삶을 위해 항상 고민하고 좋아하는 것에 끝 없이 순수한 열정과 애정을 지닌 우리집 소가 애틋하고 좋다. 뭐, 점점 더 나아지고 있으니 썩 눈에 찰 때가 있겠지. 사실 우리집 소가 건강하고 좋은 글 착착 뽑아내기만 하면 그대로 살아도 별 상관없긴 하다. 하하하.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는 내가 부양하는 소가 좋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정리해보자면, 나 다운 분별력을 갖추자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 성공한다며, 이게 옳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발에 채이게 많다. 개중에는 정말 현명하고 중요한 삶의 지혜가 있을 때도 있다. 하지만 그 정보 자체가 내 방식의 지혜는 아닐 것이다. 우리는 분별력이란 칼을 들고 그것을 나에게 맞게 깎아서 삼켜야 한다. 손질 없이 날 것으로 홀라당 집어 먹을 게 아니라. 지금 내가 떠드는 말들도 내가 정립한 나의 분별력일 뿐, 여러분 고유의 것과는 또 다를 것이다. 뭐든 곧이곧대로 듣는 것은 곤란하다.
그러니 생각을 하라. 고민하고 고뇌해야 하며 여러 사람의 말과 사례, 의견, 정보, 현명한 지혜와 오래도록 되풀이된 역사를 되짚어 봐야 한다. 집단 지성이라는 말을 들어보았는가? 각자에 맞춰 개정된 가치관과 정보들은 원본보다 훨씬 업그레이드된 것이고 한 편으로는 더 유용할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점점 진화할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복잡하고 정보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탓에 누구나 원한다면 깊은 사고를 갖출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 전문가가 넘치는 세상이다.
혹 자들은 거짓 뉴스와 가짜 정보가 난무한다며 이런 세태를 비판한다. 옳은 말이다. 누구나 자유롭게 말하는 시대다 보니 그럴듯하면 통하는 게 당연시화 되었다. 본인의 말 한마디, 의견 하나에도 책임이 필요하다. 인터넷 세상에 즐비한 무절제한 악플들과 같은 사례도 있지 않은가. 안타깝게도 아직은 이런 성숙한 시민 문화가 고착화되지 않았다. 하지만 점점 나아질 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나아지고 있다. 이런 확신은, 내가 속한 대한민국 사회에 대한, 정확히 말하면 우리나라 국민의 끈질긴 풀꽃과 같은 정신과 결국에는 선함을 추구하는 강인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어떤 핍박 받는 시대에도 한국인의 그 강인함은 꺾인 적이 없다. 꺾인 것처럼 보였을 뿐, 끝까지 잉걸불처럼 타올라 지금의 우리가 있다.
우리는 끝까지 옮고 그름을 따질 것이고 계속 진화할 것이다.
그리고 이왕이면, 타인의 말보다 나 자신의 말에 먼저 귀기울이기를, 그 존중 받은 귀로 타인과 소통하는 것이 우리 전체를 건강하고 귀하게 만들거라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