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을 빼는 것이 삶을 좌우한다
약 사 년 전, 내가 좋아하는 종이접기 수업 선생님들과 언제나처럼 식사 후 차를 마시며 수다를 떨던 시간이었다. 당시 그 모임의 막내였던 나는 언제나처럼 솔직하게 불쑥 떠오른 내 생각을 털어놓았다. 아마도, 선생님들 모두 기혼자이셨기에 자연스레 ‘양육’과 ‘성장’에 대한 주제였던 것 같다.
“전 엄마 아빠에게서 과보호에 가깝게 사랑받고 자란 것 같아요. 그래서 가끔 이런 생각도 해요. 조금만 엄하게 키우셨다면 더 일찍 철이 들지 않았을까요.”
그러자 종이접기 선생님이 고개를 기울이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철 일찍 들어서 뭐 하려고?”
그때 나는 말문이 막혔다. 당시에는 뜻밖의 질문에 허를 찔려서 그랬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면 그 질문이 가장 중요한 것을 꿰뚫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래서 그렇게 원하는 걸 얻거나 달성한다 쳐. 그럼 뭐하려고?
보통 이 질문에 확신을 가지고 바로 답하는 사람은 의외로 없을 거라 장담한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막연하고 깊은 사유 없이 자신이 뭔가를 강력하게 원하고 그게 삶을 좌지우지 한다고 쉽게 단정 지어버리기 때문이다. 나도 그랬다.
부자가 되고 싶다.
1등이 되고 싶다.
명문 대학에 가고 싶다.
최고급 아파트에서 살고 싶다.
다들 갖고 싶어하니까, 혹은 빨리 철 들어 어른스러운 모습이 멋있어 보이니까 나도 그렇게 되고 싶은 것이다. 만약 정말 본인이 원한다면, 그걸 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왜, 라는 이 단순하기 그지없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본 적이 한 번이라도 있는가?
어떤 주입된 이상적인 기준치가 있다면 그게 내가 도달해야 할 무언가라고 정해져 버렸다. 이유도 모른 채 그 특정 목표를 막연하게 열심히 원하며 달렸다. 사실 사람들 대부분이 이렇게 산다. 그리고 꽤 많은 숫자가 그렇게 막연한 목표가 진짜 자기가 원하는 거라고 착각하며 늙어 죽는다. 그래서 이유도 모른 채 삶을 힘겨워하는 것이다. 당연하다. 딱히 이유도 모르고 스스로 내면 깊이 납득도 못하면서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하니까. 하지만 그러면 안 된다. 부조리와 비효율을 떠나서 이것은 생 전체에 걸친 비극이다. 그러니 이왕 삶의 목적에 관한 정의를 내릴 거라면 나에게 맞게 정의해야 한다.
그래야 무엇이 중하고 아닌지, 힘을 줄 때와 뺄 때를 구분할 수 있다.
여러 번 언급했던 대로 삶은 유한적이다. 힘 또한 마찬가지다. 강약조절이 필요하다. 쓸데 없을 때는 힘을 빼다가 정말 필요한 순간 모아두었던 힘을 짜내 고난을 돌파해야 한다. 그러니 낭비를 그만두자.
사람들이 인생과 시간, 에너지를 낭비하는 이유는 막연한 욕심 때문일 것이다. 욕심도 가성비 있게 가져야 하며, 나를 행복하게 할 수준의, 감당할만한 적정선까지의 건강한 욕심을 가져야 한다. 막연하게 제일 많이, 그 누구보다 잘나고 1등인 자리가 내게 무조건 맞다고는 할 수 없다. 진짜 내가 가진 욕심, 진짜 욕심만 가리고 가짜 욕심은 버리자.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1차적으로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근원적인 갈망을 분석하고 구체적인 니즈를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빨리 철이 들고 싶었다면 왜 그러한가 질문했더니 그게 멋져 보였고, 그게 왜 멋져 보이느냐 또 물었더니 그들이 나보다 더 빨리 어린 나이에 더 현명하고 넓은 시야로 세상을 보고 사고하고 행동해서 결과물을 내는 게 부러웠고 뒤처진 것 같았다는 대답이 나왔다. 왜 뒤쳐진 게 두렵냐고 했더니 현재의 내 정서가 불안정하고 우울했기 때문이란 답이 나왔다. 현재에서 만족감을 얻고 있지 못한 상태니까 그것을 과거로부터 해결하려 했던 것이다. 당연하게도, 이것은 현실도피다.
나와의 대화는 생각보다 쉬우면서도 까다롭고, 지루한 듯하나 무척 재미있다.
나 자신과 많은 대화를 나누고 홀로만의 시간을 갖고, 사색과 명상, 산책을 하자. 세상의 모든 정보와 소리로부터 나를 차단하고 단절된 고요한 상태에서의 고요를 견디고, 그게 익숙할 때까지 반복해야 한다. 그 누구보다 나 자신과 친해져야 한다. 솔직하게 민얼굴로 나와 대면하고 ‘나’가 원하는 걸 알아내야 한다. 그걸 알아내면, 생각보다 모든 것이 간단해진다.
어지러운 방과 같은 나를 정리하고 나면 세상을 보는 시야가 달라진다. 잔뜩 먼지 낀 채 방치했던 창문, 안경을 닦고 난 뒤의 변화와 같다. 기실 세상사의 대부분의 문제, 불행의 원인은 스스로 만드는 것이 대부분이다. 불교적 용어로 번뇌라고 하던가.
그러니 이 번뇌를 덜기만 해도 정신과 영혼이 날렵해지고, 온몸을 딱딱하게 경직시키던 힘이 빠진다. 힘을 빼면 나를 둘러싼 여러 자질구레한 일들이 신기할 만큼 붓기 빠지듯 저절로 개운하게 해결되거나 그전보다는 나아지는 것을 경험한다.
이런 정신 디톡스가 어렵게 느껴진다면, 좀 더 명확하고 실리적으로 따져보자.
거창하게 과대평가하거나 지레 겁을 먹거나, 오지 않을 위협을 대비하거나, 인간은 위기상황이 닥쳤다는 생각-혹은 뇌의 착각-에 빠질 때면, 그러니까 그냥 불안하고 초조하기만 해도 근육이 굳고 온갖 상상에 갇혀서 부정적인 시야로 멀쩡한 시각도 왜곡해서 보고 그냥 한 말도 꼬아 듣거나 피해의식에 갇힌다. 의미 있고 희망적인 일을 해보기도 전에 포기하거나 부정해버린다. 또는 본인의 능력으로 충분히 하고도 남는 일을 망쳐버릴 때도 있다. 인내심을 갖고 지켜보면 얻고도 남는데 조급함에 현상유지를 못 하기도 한다.
이 모든 어리석음이 어디서 발생할 것 같은가.
불필요하게 힘이 들어가서다.
즉 힘이란 걱정, 불안, 초조, 공포, 욕심, 열등감 등등을 말한다. 걱정, 불안, 초조, 공포 등이 발생하는 요인은 대부분 탐욕에서 비롯되니, 결국 힘을 빼는 것이란 욕심을 버리라는 뜻이다. 잘하든 못하든 그건 나다. 사람은 완벽할 수 없고 모든 것을 통제할 수도 없고 때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일도 종종 일어난다. 그런 불완전한 나라도 나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자연스레 받아들이라는 말이다. 생각보다 ‘나’라는 인간은 지금까지 구른 밥으로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썩 능력 있거나 아직 내가 발견해주지 못한 잠재력이 넘칠 것이다. 최소한, 힘이 잔뜩 들어가 목과 어깨가 뻣뻣한 현재의 당신보다는 원래의 당신이 더 능력 있는 사람이다.
가장 솔깃한 진실은, 힘을 빼야 모든 것이 더 수월하게, 더 나답게 잘될 수 있다. 가장 나답고 자연스러울 때 최고의 효율이 나온다. 힘을 줘서 쥐어짜 낸 문장과 설렁설렁 즐겁게 써낸 문장은 읽히는 매끄러움과 흡인력 자체가 다르다. 몇 번을 고쳐 써도, 단 한 번 일필휘지한 글의 자연스러움은 흉내 내기 힘들다. 나는 이것을 여러 시행착오 끝에 확실히 알았다.
그리고, 알아두자. 생각보다 사람은 쉽게 죽지 않는다. 어떻게든 힘든 순간은 지나가기 마련이니 흘러가는 대로, 힘을 빼고 물살에 몸을 맡기듯이 행동하고 말해보자. 내 걱정보다 ‘나’는 살기 위해 발군의 적응력을 발휘하거나 어느 순간 보면 걱정거리가 해결되어 있을 것이다. 우리는 너무 과도하게 걱정과 불행을 만든다.
때론 욕심 자체가 짐이 된다. 너무 잘하고 싶어서, 못 하면 어떡하지 지레 하는 자질구레한 걱정들, 전부 인간이라면 당연한 거지만 안타깝게도 당장 닥친 상황을 해결하는 데는 전혀 도움이 안 된다. 외려 방해가 된다.
당연하게도 이러한 스트레스들은 건강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두통, 위장장애, 불면증, 우울증 기타 등등의 갖은 신경증적인 증상을 더불어 면역력조차 떨어진다. 요즘 같은 시대에 면역력이 떨어지는 건 최악이다. 감기나 배탈만 나도 손해다. 체력과 컨디션 저하는 물론이고 괜히 병원에 약값만 나간다.
그러니 당장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면, 이렇게 스스로에게 말해보자.
천둥·번개가 치고 비가 쏟아져서 밖에 나갈 수 없어 꼼짝없이 집에 갇히게 되었다고 치자. 이 상황에서 발을 동동 굴리며 어쩔 줄 몰라한다고 당장 하늘이 맑게 개는가? 네가 제우스인가? 당연히 나는 신도 아니고 한낱 인간이다. 그러니 그칠 줄 모르는 비를 보며 스트레스 지수만 높이는 한심한 짓을 그만두고 방콕하며 더 알차고 흥미롭게 시간을 보낼만한 다음 플랜이나 짜라. 최소한 자기 학대를 하며 시간 낭비를 하는 것보다는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