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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삶 Aug 18. 2021

성공, 꼭 해야하나?

-내 삶을 지배하는 타인의 영향력 걷어내기



한 때의 나는 능력주의에 심취해 있었다.


능력대로 성공하고 그에 따른 큰 보상을 받고 사회적 부를 상당수 가져가는 게 가장 정당한 데다 평등하고 효율적이라고 믿었다. 결국 그의 재능과 능력이 사회적 보탬이 되고 사회 구성원들이 그 혜택을 누릴 테니 그게 뭐 나쁜가 싶었다. 유명한 연예인이나 성공한 사업가, 대통령이 된 정치인도 각자의 방식대로 사회와 대중에게 공헌한다. 그리고 그만큼의 수익을 가져가고 명예도 얻는다. 우리가 미디어나 콘텐츠로 매일 접하는 성공적이고 긍정적인 인간군상들은 대개 이렇다. 그리고 일개 군중 속의 1인에 불과한 나 또한 그렇게 실력을 쌓으면 성공은 당연히 따라오는 거다, 라는 건실하고 교과서적인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그걸 추구하는 게 당연한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도. 


그래서 서른의 나는 우선 내 쭈글쭈글하고 말캉한 뇌에 들러붙은 이 근시안적 논리를 때려 부수는 게 가장 첫 번째 관건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건 내 행복과 더 나아가 나의 삶을 꾸리는데 하등 쓸모없는 개소리에 불과하니까.


얼핏 보면 확실히 이 논리, 능력주의는 매력적이고 합리적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성공이라는 것은 우리가 납득할 만하게 정당하고 합리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열심히 공부해야 성공한다는 막연한 성공 판타지를 주입받았다. 기출문제를 열심히 풀고 잠도 줄여가며 암기를 해서 성실하게 노력하면 좋은 대학을 가고 또 그곳에서 또 열심히 스펙을 쌓고 공부를 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이미 우리는 알고 있다. 이것이 현실에 비하면 얼마나 쉽고 단순하기 짝이 없는 순진한 기대인지를.


물론 그 ‘교과서대로 했어요’가 통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전체 인구에서 소수에 속할 것이다. 그러면 보통의 ‘내’가 속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후자의 확률이 높음에도 그 외 나머지는 낙오자가 된다. 이게 과연 평등하고 현명한 분리인가? 극소수의 승자 외의 패자 시스템은 구조상의 당연한 논리일 뿐 그 등수에 들지 않는 사람들이 실패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니까, 당신이 1등이 아닌 게 당신 탓은 아니란 얘기다. 당신의 노력이 부족해서도, 어쩌면 재능이 부족해서도 아닐 것이다. 인생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다.


노력해야 성공한다? 말은 좋다. 그러나 노력은 성공의 기본 조건일 뿐, 필연 조건이 아니다. 노력하는 건 당연한 거고 능력, 재능, 그 외에도 반드시 다른 조건들이 더 필요하다. 

아주 진부하고 허탈하게도, ‘행운’이라는 필수 조건 말이다.


몇 년 전, 나는 한 유명한 미국 대학의 졸업 축사 영상을 보게 되었다. 연설하던 그 사람, 팀 민친은 본인이 깨달은 인생의 몇 가지 지혜들에 대해 들려주었는데, 놀랍게도 사회적 성공을 이룬 그가 강조한 것은 ‘운’이었다.


"어차피 모든 것은 운이다. 태어난 것도 운이며 성공이 온전히 자신의 공로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과 누군가 실패했다고 해서 그를 탓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당신을 좀 더 겸손하고 연민 있는 사람으로 만들 것이다."


당시만 해도 어렸던 나는 그가 말해준 지혜들이 이해가 잘 안 갔다. 나는 성취 지향적이며 야먕이 컸고, 불행인지 행운인지 내 분야에서 그럭저럭 통할만 한 재능도 있는 데다, 대한민국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성공을 쟁취하는 게 삶의 당연한 목표인 양 세뇌받은 사람이었다. 더불어 한창 젊기까지 했으니 내 앳된 귀에 그의 삶을 관통하는 지혜가 와닿기나 했겠는가.


놀랍게도 내가 헛소리로 취급했던 그의 대부분의 말은 옳은 말이었다. 꿈을 꼭 가질 필요는 없다, 행복을 쫓지 말 것, 같은 나의 삶의 방식을 부정하는 것들이 말이다. 서른이 되고 나서야, 나는 그가 지적한 본질에 대해 이해했다(완전히는 아니겠지만)


20대의 나는 꼭대기만 보며 달려 올라가 정상에 깃발을 꽂으면 영원한 행복과 부 같은 불멸의 보상이 뒤따라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존재하지 않는 해피엔딩을 쟁취하기 위해 달려가던 한 마리 특별할 것 없는 망아지였다. 그랬다. 나는 그냥 평범한 사람이다. 나는 내 생각보다 그다지 특별하지 않다. 

-어쩌면 이 문장이 어른이 되기 위한 첫 번째 관문일 것이다-. 


설사 어린 나이에 놀라울 만한 사회적 성공을 거뒀다 한들, 그것이 내가 특별하거나 대단하다는 뜻은 아니다. 물론 이것은 대단한 성취이다. 그러나 한 사람이 높은 성취를 거두기 위해서는 적당한 실력과 노력, 또한 그것들과 절묘하게 맞물리는 환경적, 시대적인 운이 필요하다. 나를 지지해주는 사람들, 다수에 속하는 긍정적인 평가, 그리고 이 결과물에 한몫을 거둔 동료, 시스템 등이 있다. 혹은 이것들은 유행이나 알고리즘 같은 단어들로 불리기도 한다. 


나는 이것을 형세라고 부른다.


영화 관상 김내경의 대사에서 그와 비슷한 대사가 나온다.


"난 사람의 얼굴을 보았을 뿐 시대의 모습을 보지 못하였소. 시시각각 변하는 파도만 본 격이지. 바람을 보아야 하는데. 파도를 만드는 건 바람인데 말이오. 

당신들은 잠시 높은 파도를 탔을 뿐이오. 높이 오른 파도가 언젠가 부서지듯이 말이오."

-영화 관상- 김내경의 마지막 대사.


여기에서의 파도가 곧 형세가 아닐까 생각한다. 시대적 흐름과 니즈, 운, 그리고 그 파도를 탈 만한 뭔가가 내게 있는가.  


노력과 실력까지는 본인이 어찌어찌 쌓아 올라갈 수 있더라도 나머지 것들은 한 사람의 역량으로는 불가능한 것들이다. 제 아무리 튼튼한 배를 만들어 놨어도 바람을 타지 않으면, 파도가 없으면 어떻게 출항을 하겠는가. 말 그대로 ‘운’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겸손해야 하고, 본인의 성취가 온전히 자기만의 것인 양 자만하지 말아야 하며, 동시에 감사해야 한다. 또한 실패했다 한들, 그것은 온전히 당신만의 책임이 아니다. 그러니 한 개인이 감당하기 벅찰 만큼의 절망을 떠안을 필요도 없다. 그렇다 하여 모든 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사람이 되라는 말은 아니지만-내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대부분의 평균 지능을 갖춘 분들은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능력주의란 얼마나 불완전하고 허망한 이론인가.


사회에 만연한 능력주의는 모든 성과를 한낱 개인-소위 천재, 영웅 같은 희귀 케이스나 허영심을 자극하는 성공신화 등-에게 몰듯,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실패와 좌절을 개인의 책임으로 떠넘기는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또한 한 사람이 그 분야의 최고 권위자라 한들, 그가 과연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전문가보다 모든 면에서 훌륭하고 옳은가? 과연 가장 뛰어난 실력과 잠재력이 있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이따금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전문 의사가 의료사고를 일으키고, 특정 분야의 일인자가 온전한 실력이 아닌 인맥과 그 밖의 방식으로 이름을 알렸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기도 한다. 


즉, ‘사회적인’ 성공은 어쩌면 인생 전체를 걸 만큼의 가치가 없을지도 모른다. 능력주의란 결국 타인의 인정을 전제로 한다. 그냥 성공이 아닌 사회적인, 이라는 수식어를 계속 붙인 것도 내가 생각하고자 하는 성공과 구분 짓기 위해서다. 


하여 내가 내린 결론은, 내 성공을 타인이 아닌 내가 결정하는 것이다.



(-다음 화, 나는 나의 전장을 선택했다, 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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