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그릇의 철학
연말을 보내고 있다.
그런데 남편이 콜록콜록 열이 나고, 둘째는 크리스마스 날 목이 따갑고 열이 나기 시작, 막내는 발가락이 부러진 지 3주째다. 크리스마스 날 어디 못 나가고 하루 종일 가족들과 집에서 영화를 보며 먹고 치우고 했다. 그러고 나니, 크리스마스라고 나가서 외식할 기대를 했던 마음이 채워지지 못했기 때문인가? 약간 지쳐버린 느낌.
나는 가족들을 챙기다가 지칠 때가 찾아오면 마음속으로 자신을 질책하곤 했다.
'고작 이 정도에 지치니. 엄마인데, 버텨야지.'
어제는 내 생일이었다. 드디어 빼도박도 못하게 만으로도 40살이 되었다. 혼자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오늘은 지친 순간에 그런 생각을 했다. 버텨야 하는 순간에 마음을 비워보자. 그리고 괜찮다고 넘기자.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나 모르겠다. 그냥 나에게 선물을 주듯, 뭔가 주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오래전에 재미로 사주를 봤다가, 재능이 있는데 그릇이 작다, 약해서 타고난 운을 잘 담지 못할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런 말을 듣고 나니 참 속상하기도 했다. 살면서 가끔 내가 약하다고 생각될 때마다 생각났다. 나는 왜 못 버티지, 나는 왜 이렇게 약하지.... 아 나는 안 될 사람인가 보다. 그런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문득 예전에 15년 전 첫애를 낳았을 때의 일이 생각났다.
첫애를 낳고 모유 수유를 시작할 때의 일이다. 조리원에서 막 모유 수유에 대해 배울 때, 가슴이 너무 작아서 걱정하는 나를 보고 모유 선생님이 웃으며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산모님 가슴은 밥통으로 치면 작은 밥통인데, 제때 제때 잘 비워주기만 하면 젖이 금방 도로 차는 도깨비방망이같은 밥통이라고.
어떻게 조금 들여다보고 아셨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 말에 힘입어 열심히 젖을 계속 비웠다. 그랬더니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젖이 잘 돌아서 모유 수유를 성공적으로 할 수 있었다.
내 사주가 그릇이 작은 사주여서 자주 지친다는 건, 그게 약하다는 뜻이 아니라, 자주 비워줘야 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되지 않을까.
생각과 감정이 끊임없이 생기는 사람. 그걸 자꾸 담아두려고 하니까 몸이 지치는 것 아닐까.
감정이 차오르면 말, 글, 숨, 울음, 침묵 등을 통해 비워주고,
생각이 쌓이면 배출해 줘야 하는 것.
밥통이 비워져야 도깨비방망이처럼 저절로 생기는 밥이 새로 담길 수 있듯이 말이다.
그러니까, 작은 그릇의 철학은
강철 같은 멘탈도 아니고,
끝까지 버티는 체력도 아니고,
회복을 만들어내고 순환시킬 줄 아는 감각 아닐까.
그렇게만 해주면 도깨비방망이처럼, 비워주기만 하면 다시 차오르는 힘이 있다는 것 아닐까.
지친 느낌은 실은 소진되어서 찾아오는 게 아니라, 회복이 안 되어서 오는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게 필요한 것은 비워내고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나를 채우는 것인지도.
그래서 오늘도 이곳에 내 생각을 끄적끄적 쓴다.
새롭게 솟아나는 감정과 생각들로 나를 채우기 위해서.
세상의 모든 작은 그릇들이여,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