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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고운 Oct 21. 2020

코로나 블루의 역전

'조급함'과 '실패자라는 의식'을 버리고 얻은 것들

코로나19가 전 세계적인 이슈가 되면서 우리의 일상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나를 둘러싼 상황은 변하지 않았지만(아니 오히려 더 나빠졌지만) 마음가짐이 달라지니 세상이 달라 보였다. 더 이상 무기력하고 우울할 필요가 없었다.

코로나 블루의

어딜 가다 맨 앞자리에 앉는 적극적인 모습은 기본, 소신 발언도 서슴지 않던 내가 왜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침체되어 있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억울한 감정이었다. 같은 학교, 같은 학과, 같은 해에 졸업한 남편과 분명 출발점은 같았지만 엄마가 되고 정신을 차려보니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큰 격차가 벌어져 있었다. 남편은 과장, 차장으로 쭉쭉 승진하며 우수사원 타이틀도 놓치지 않고 회사에서 인정받으며 고속성장 중이었다. 게다가 몇 번의 스카우트 기회가 있어 몸 값도 쭉쭉 수직 상승 중이었다. 어차피 배우자와 나는 한 팀 아니던가. 하지만 나는 바보같이도 이런 남편의 모습을 보며 마냥 기쁘지 않았다. 한편으로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남편 못지않게 일 욕심이 많았고, 업무 성과도 꽤 좋은 편이었지만 직장생활 10여 년 동안 직급은 고작해야 대리였다. 일과 육아를 정신없이 병행하며 하루하루 전전긍긍하는 처지였다. 일하는 엄마라는 죄책감은 나날이 커져만 갔고, 생각지도 못한 변수들로 인해 내 계획과는 전혀 상관없이 결국은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이 자라고 조금 살만해지자 나름 악착같이 공부해서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쳤다. 하지만 그때뿐이었다. 재취업의 기회를 노렸으나 아직은 자녀들에게 절대적으로 엄마가 필요했다. 또 한 번 현실의 벽에 부딪쳐야 했다. 물론 엄마라는 고귀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참 감사한 일 이긴 하다. 머리로는 알지만 내내 속으로 툴툴거렸다. 아무리 발버둥 쳐봐도 결국은 ‘경력단절 여성’이라는 초라한 성적표만 남았기 때문이다.


해봤자 티도 안 나는 사소한 집안일과 사투를 벌이며 하루를 훌쩍 보내고, 아이들 준비물 챙기느라 동분서주하고, 계절마다 바뀌는 옷과 이불 정리는 기본, 아이들의 작아진 옷과 신발을 사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물론 생필품은 늘 적정 수준의 재고를 파악해서 유지해야 했고, 빨래와 청소, 장보기와 요리는 해도 해도 끝이 없었다.


가족들 뒷바라지를 하는 것이 급선무였기에, 정작 나를 위한 시간을 보내기 힘들었다. 그렇게 점점 나를 잃어갔다. ‘OO엄마, OO아내’라는 타이틀만 남고 ‘한고운’이라는 세 글자는 영영 없어져 버린 것 같았다. 이 반복되고 끝도 없는 지긋지긋한 일상에서 벗어나, 차라리 회사를 다니고 돈을 벌고 싶다는 생각이 늘 목구멍까지 차 있었다.


“너희들 이렇게 자꾸 말 안 들으면, 엄마 당장 내일부터 회사 다닐 거야!”

아이들에게 협박의 도구로도 자주 등장하는 레퍼토리였다. 이런 감정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고, 잉여인간 같다는 자책감도 들게 했다.


그렇게 겉으로는 큰 이상은 없어 보였지만 조금씩 마음에 병이 들어갔다. 나의 무기력함을 자각했을 때는 이미 한참 증세가 심각해진 후였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몰랐다. 난생처음 겪는 무기력감에 당황스럽기만 했다.


하지만 코로나 19 사태가 터진 이후, 상황이 역전되었다. 이런 국가적이고 전 세계적인 이슈에 자녀들을 온전히 돌볼 수 있는 현재 나의 위치가 가장 빛을 발했다고나 할까?


평소에 음식을 사 먹기보다 삼시  끼 집밥을 열심히 해 먹고, 빵이고 치즈고 웬만하면 집에서 만들어 먹으며 자급자족하는 생활습관이 몸에 밴 나에게는 이러한 비상상황이 의외로 버틸만했다. 등교 대신 주구장창 온라인 수업을 하는 첫째 아이, 아예 등원을 못하고 몇 달째 집에 데리고 있는 둘째 아이, 그리고 장기간 이어진 남편의 재택근무가 생각보다 크게 위기 상황이 아니었다. 그냥 원래대로 해 오던 일상을 계속해서 살아가는 것 같았다. (물론 네 식구의 삼시 세 끼를 집밥으로 챙기는 일은, 돌이켜보니 난이도 최상이긴 했다.)


자녀들을 돌보고, 학습을 시키고, 놀아주는 등 다양한 역할을 감당하는 데는 아무래도 전업주부인 내가 유리했다. 남편의 도움을 받고, 분담을 한다 한들 한계가 있고 결국은 엄마가 감당해야 하는 일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일터에 있었더라면, 얼마나 마음이 조급했을까, 그리고 자녀들에게 미안함이 컸을까. (물론 일도 가정도 균형 있게 잘 양립하고 있는 워킹맘들, 진심 존경스러운 마음이고 박수를 보내고 싶다.)


평소에 지인이나 친인척, 자녀들의 친구에 크게 의존하지 않고, 딱 우리 네 식구가 중심이 되어 생활하는 습관도 상당히 감사한 일이었다. 동네 놀이터를 가는 일부터 시작해서, 인근 공원 나들이, 여행 등 무얼 하든 친구와 약속을 잡고, 같이 한 적이 거의 없는 편이다. 조촐하지만 우리 가족끼리 즐겁게 놀고, 가족 안에서 해결하다 보니 우리 사이는 더욱 돈독해지고, 자녀들이 엄마 아빠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점점 강해지는 걸 경험했다.



역설적이게도 외부와 단절된 채
계속되는 집콕 생활을 통해,
이런 위기에도 불구하고
큰 흔들림 없이 중심을 잘 잡으며
가족들이 안정적이게 생활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물론 직장에서 수고하며 돈을 벌어오는
남편의 덕이 컸음은 말할 것도 없다.

남편은 가정 바깥의 일을 책임지고,
나는 가정 안의 일을 책임졌다.

서로 역할 분배를 통해
완벽한 분업을 이루었다.

그리고 각자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해 낸 결과였다.

 ‘그래도 내가 지금까지 잘 살아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잘 버텨왔고 대견하다는 생각에 위로가 되었다. 낮아진 자존감도 서서히 회복되었다. 일 때문에 시간적으로 쫓기지 않고, 물리적으로 단절되지 않은 채 24시간 내내 자녀들을 돌볼 수 있는 전업주부라는 나의 현 위치가 참 다행이라 생각되었다.


내가 그동안 그렇게도 투덜거리며 억지로 감당해오던 엄마의 자리는 더 이상 벗어나고 싶은 자리가 아닌, 내가 꼭 있어야 할 가장 소중한 자리임을 뼈저리게 느꼈다. 자꾸만 불만스러웠던 내 일상이 하나둘씩 감사한 일들로 변했다. 상황은 바뀌지 않았지만(아니 오히려 더 나빠졌지만) 마음가짐이 달라지니 세상이 달라 보였다. 더 이상 무기력하고 우울할 필요가 없었다.


조급함을 버리기로 했다.
실패자라는 의식을 버리기로 했다.

나의 행동들이 이윤을 창출하고, 효율적이고, 소모적이지 않음에 대한 자책을 멈췄다.

지난 일에 대한 미련과 후회도 훌훌 털어버렸다.

나의 가치를 애써 증명하지 않아도
지금 이대로 잘 살아왔고,
앞으로도 잘 감당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외부 도움 없이 두 자녀를 온전히 감당하며 잘 키우고 있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나 자신을 격려해주고 싶었다. 그 후로부터 시들어 있던 나 자신이 조금씩 생기를 찾고,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다. 


결국 현재 우울감을 벗어나는 가장 빠른 방법은 불가항력적인 외부 요소를 바꾸는 것이 아닌 그나마 통제 가능한 내부 요소들을 바꾸는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나 자신을 바꾸는 것이 가장 우선순위였다. 그리고 이를 실천함으로써 마음의 짐을 내려놓게 되었고 예전보다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나의 마음가짐, 생활습관, 관계 등을 점검하고 변화를 주었더니 하나둘씩 긍정적인 신호가 켜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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