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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연경 Aug 18. 2024

내 남자친구는 가부장적인가?

30대 INFJ와 ESTP의 연애

30대 INFJ(여, 글쓴이)와 ESTP(남) 커플 이야기

※ MBTI는 참고 사항일 뿐입니다. MBTI를 쓴 것은 여러분의 관심을 끌기 위함일 뿐,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며칠 전 아버지의 생신이었습니다. 아침 아홉 시 반쯤에 집으로 가니 엄마는 언제나처럼 가스레인지 앞에서 저를 맞이해 주었어요. 며칠은 거뜬하게 먹을 듯한 커다란 냄비에는 미역국이, 밥솥에는 따끈한 팥밥이 있었고 그 외에도 바삭하게 구운 생선, 깨가 뿌려져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운 불고기, 노란 빛깔로 시선을 사로잡는 새우튀김이 식탁 위에 자리 잡았지요.


아버지는 TV 앞에 돌부처처럼 앉아 있었습니다. 생일이라서 편하게 앉아 있는 것이라면 좋겠지만, 엄마가 부엌에 있을 때 아버지의 위치는 떠나버린 누구라도 기다리는 돌부처처럼 언제나 변함없었습니다.


어찌나 많이 봤으면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펼쳐지는 이 장면을 거북하게 느낀지는 꽤 되었어요. 최근 책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를 보고, 당연하다고 여긴 여성의 가사 노동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서 한층 더 언짢아졌을 뿐이죠. 아버지는 공무원오래 하시며 본인은 밑창이 죄다 떨어질 때까지 신발을 신어도,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는 일에는 전혀 게으름을 피우지 않으신 존경받을 분이에요. 또한 현재 남자친구(곱슬머리의 그)에게도 저는 필요한 조언과 존중을 받으면서 자존감을 채웁니다. 하지만 일을 열심히 하고 의지가 되니까 모든 집안일을 여자가 해야 한다는 이론에는 단전에서 화가 솟구치면서 반기를 들게 됩니다. 심지어 엄마는 가정주부가 아니라 교직에 20년 넘게 있으신, 저도 엄마만큼 오래 일하겠다고 생각하게 만드신 분이니까요.


엄마는 본인이 집안일 총책임자라는 사실에 거부감이 없는데 오히려 저 혼자 속에 천불이 나곤 합니다. 결국 전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울 때는 이해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저 관찰했습니다. 아, 저런 분도 있구나.


곱슬머리의 그와 저는 결혼하지 않았기에 미래에 관한 생각을 어설프게 주고받을 때가 있는데요. 지금까지 곱슬머리의 그는 누군가가 가정주부면 저에게 "그 사람은 일을 안 하잖아"라는 말을 몇 번 했습니다. 무심한 문장처럼 보이지만 그의 이해가 어렵다는 듯한 말투와 표정이 더해진 모습을 보았을 때, 그는 여자가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저 또한 책 <도서번역가의 세계로 초대합니다>에서 출산 직전까지 번역 샘플을 보낸 김지윤 번역가처럼 일하겠다는 다짐을 오래전부터 자신에게 두었습니다. 물론, 실제로 출산하는 상황을 겪지 않았으니 그저 생각에 불과합니다. 출산은 여성에게 미치는 영향이 워낙 큰지라 미경험자가 그쪽의 미래를 상상하거나 결론짓기 무척 어려워요.


하지만 제 번역 일 등의 미래 행방은 상상하기 어려워도, 미래에 집안일과 육아 분담이 비정상적으로 저에게 기울어져 있을 때 눈앞의 세상이 얼마나 노래질지는 벌써 예상됩니다. 돌부처 아버지처럼 행동하는 남자친구를 보면 곱슬한 머리칼을 수십 번 세게 쥐어뜯고 싶어질지도 모릅니다. 물론 쥐어뜯는 상상만 하고 끝이 보일 듯 안 보이는 집안일과 육아 분담 싸움을 이어 나가겠지요.


저는 걱정이 많습니다. 짧지만 연애하면서 몇 가지 상황을 본 후, 저는 제 눈앞의 세상이 노래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빠졌습니다. 미래를 혼자 상상하고 어찌나 분노했는지 그에게 속상한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 글까지 썼습니다.



곱슬머리 씨는 가부장적인 것 같아요.

곱슬머리 씨는 여자가 일하는 것, 집안일하는 것, 육아하는 것을 너무나 쉽게 생각해요. 곱슬머리 씨는 제가 돈도 300만 원 이상 벌어오고 집안일도 다 하고 육아까지 다 하는 어벤져스도 못 할 일을 저한테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과 말투로 얘기해요.


그건 우리 엄마도 못한 일이에요. 엄마가 경력 단절이 되지 않으려고 일했을 때 모든 친척이 자주 저와 함께 있었고, 언니와 저를 키웠어요. 그렇게 최선을 다해 육아했음에도 저는 엄마의 빈자리를 많이 느꼈고 엄마는 육아를 힘들어했어요.


근데 곱슬머리 씨는 저한테 이렇게 말했죠? 아이를 출산했을 때 우리 엄마가 도와주러 오면 제가 오전에 1, 2시간 잘 수 있으니까 곱슬머리 씨가 퇴근하고 돌아와도 저녁, 새벽까지 네가 잠도 자지 말고 애를 봐라.


심지어 육아할 때 우리 엄마를 자주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요. 우리 엄마가 힘들 것 같다고. 곱슬머리 씨는 제가 힘든 건 안 보이나 봐요? 곱슬머리 씨는 우리 엄마도 하지 못한 슈퍼우먼이 되기를 나한테 바라요.

그 외에, 곱슬머리 씨는 항상 식사하고 나면 저한테 치워달라고 해요. 


(중략)


곱슬머리 씨를 사랑해서 참고 병에 걸리면서 할지도 모르지만 저 자신을 위해서 절대 그렇게 안 할 거예요. 저는 여자가 하는 집안일, 육아, 일이 무시당하면 제 인격까지 짓밟히는 것 같아요. 그게 저의 가치관이에요.


그래서 어떻게 하라고? 라고 생각했다면

그저 제 뜻, 저의 가치관을 알아달라는 이야기입니다.



돌이켜 보면 곱슬머리의 그가 진정으로 저를 무시해서 편지에 적힌 말을 했다기보다는 진심으로 집안일과 육아를 몰라서(저도 마찬가지지만) 얼떨결에 한 말일 가능성이 큽니다.


글은 길지만 입술 밖으로 말이 쏟아지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전화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싸움으로 번질까 봐, 감정 섞인 말을 하고 혼자 자책할까 봐 첫머리의 "가부장적인 것 같아요"를 읽는데도 한참 뜸을 들이다가 겨우 입 밖으로 내놓았더니, 곱슬머리의 그가 그 얘기를 하고 싶었냐며 무진장 웃더군요.


뒤이어 이후의 일을 벌써 걱정하냐면서, '당장 넌 다음 주에 일본 출장을 가야 하고 바쁜 7월이 예상되는데 눈앞의 일부터 잘 처리하자. 그리고 네가 말한 집안일과 육아는 네가 바쁘면 내가 하고, 내가 바쁘면 네가 하면 되지 않겠냐. 너무 미래의 일을 얘기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기본적인 마음가짐이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를 예측, 예언하는 INFJ(저)와 미래나 과거는 큰 의미가 없고 현재가 중요한 ESTP의 성향이 여기서도 드러납니다. 이렇게나 다르니 앞으로 우리가 서로에게 해야 할 건 이해하려는 노력뿐이겠지요.


그의 웃음소리에 긴장이 조금 풀려 전화하면서 밑 부분도 읽었지만, 안타깝게도 이번에는 글의 30% 정도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 글의 원본은 김치처럼 묵혀 뒀다가 그와 좀 더 친해지면 전달하기로 혼자 정했습니다.


삼십 년 이상을 다르게 살아온 우리가 함께 지낼 때 싸우지 않는 건 판타지 속에서나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집안일과 육아를 하며 서로의 다른 점에 얼마나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지 무서워서, 앞으로도 끊임없이 생각하고 궁리하겠다며 겁 많은 삼십 대 여성은 다짐합니다.


글 초반에 등장한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를 읽고, SNS에 책 감상문을 써보기로 했습니다. "여성의 가사 노동이라는 당연히 여겨 왔던 부분을 당연하지 않게 생각하게 되었다"라는 문장을 씁니다. 그리고 다음 문장을 씁니다.


"하지만 다른 이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저도 당연한 듯 하게 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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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경 번역가: https://linktr.ee/linakim_8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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