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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연경 Aug 11. 2024

결혼은 맞춤 정장이 아닌 기성복

30대 INFJ와 ESTP 커플 이야기

30대 INFJ(여, 글쓴이)와 ESTP(남) 커플 이야기

※ MBTI는 참고 사항일 뿐입니다. MBTI를 쓴 것은 여러분의 관심을 끌기 위함일 뿐,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책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에서 작가 은유는 "모든 사랑은 남는 장사다"라고 말합니다. 새벽 2시 58분, 문득 이 말이 맞나 싶었습니다. 두 가지 업무의 마감일이 같은지라 새벽에 깨어 번역하다가, 잠시 딱딱한 바닥에 드러누워 쉬고 있을 때였습니다. 


제가 곱슬머리의 그(현재 남자친구)를 만나기 전, 이전 남자친구와의 연애에 7년이라는 시간을 쏟고 시간이 얼마 흐른 뒤 느낀 점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결혼에는 타이밍이 있다', '인연이 안 될 사람은 최대한 빨리 끊어내야 한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것이 아니다'. <귀찮지만 행복해 볼까>에서 작가 겸 번역가 권남희가 말했듯이 친구와 달리 남자는 아니다 싶으면 미련 없이 도어 슬램(door slam)을 해야 하는데, 맹탕인 사람처럼 맺고 끊음을 칼같이 하지 못한 지난날의 저를 꾸짖었던 적도 있었죠.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말하기 어려운 치명적인 소재를 제외하고 이전 남자친구는 제 곁에서 어두운 길을 밝히는 등불일 때가 많았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 뭐"라는 한마디를 자주 하던 이전 남자친구는 제 마음속에 자주 일어나던 화재를 소방수처럼 꺼뜨려 주었습니다. 포용력이 넓어서 제가 지닌 맞을지도, 잘못되었을지도 모를 생각을 있는 그대로 듣고 받아들여 줬죠. 이때의 연애 경험으로 그나마 더 다른 사람을 위하는 인간(?)이 되어서 현재 남자친구인 곱슬머리의 그에게도 말 한마디를 더 친절하게 하려고 의식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떠올리기만 해도 입에 미숫가루를 가득 털어 넣은 것처럼 텁텁해지는 추억들이 많았지만 저를 상장시킨 사랑은 무조건 남는 장사일 수도 있겠네요. 오늘 아침에는 미숫가루를 물에 타서 맛있게 먹기도 했고요, 하하.


연예인 안선영이 라디오 스타에서 인간관계를 맺을 때 자신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세 가지를 정해 놓고, 그것만 아니면 마음을 열고 사람을 만나보라고 하더군요. 하긴 삼십 대가 지나고 나이가 들수록 의무적으로 학교에 가고 자연스럽게 타인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점점 줄어듭니다. 저와 인간관계를 맺는 데 있어 똑 닮은 초등학교 친구가 썼던 표현처럼 '폐쇄적'인 성격이 조금은 걱정되었던지라, 메모장에 남자친구, 여자친구로 나누어서 절대 안 되는 세 가지를 적어보았습니다. 부끄러워 여기에 쓰지는 못하지만 워낙 연인 관계에서 흉흉한 일이 많은 시대다 보니 남자는 뉴스에 나올 법한 큼직한 일이 많고, 여자친구는 저의 감정선을 건드리는,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저의 심기를 건드리는... 예민함을 일깨우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세 가지를 적고 보니 곱슬머리의 그는 절대 안 될 세 가지에 해당이 안 됩니다. 저조차도 몇 년 전과 직장, 사는 곳, 취미, 좋아하는 작가가 달라지고 아기를 싫어했다가 좋아하게 되는 등 생각도 달라졌으니 그와의 관계에서도 시간이 흘러 생각지도 못한 변화가 속출할 예정이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해당하는 부분이 없습니다. 물론 이 세 가지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해서 상대가 저의 꿈꾸던 모습대로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곱슬머리의 그도 마찬가지겠죠. 


제목에 나와 있듯 우리는 MBTI부터 정반대입니다. 나 INFJ, 곱슬머리의 그 ESTP.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말처럼 남녀의 차이도 있어서, 곱슬머리의 그가 노력하는데도 그와 저녁에 전화하고 나면 왜인지 마음이 시리고 텅 빈 구멍이 채워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짐작건대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했을 때 나도 너와 같다며, 넌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며 공감하고 티키타카 하며 케미를 이루지 못할 때가 있기 때문일 겁니다. 대화에서조차 효율성을 추구하는지 결과적으로 큰 문제가 없으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그의 성격에서 비롯되는 듯합니다. 반대로 저는 무심한 결과보다 인정받는 과정이 중요한 사람이고요.


언젠가 이루어졌던 대통령 선거 전, 작가 유시민이 한 말이 떠오릅니다. 


"대통령은 맞춤 정장이 아니라 기성복이다."


내 입맛에 꼭 들어맞는 대통령은 없으니 기성복처럼 나와 있는 후보 중에서 최선을 골라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저는 인생을 살며 대통령과 상관없는 인간관계에서 이 말을 적용하곤 했습니다. 남자든, 여자든 나에게 맞추어 만들어진 맞춤 정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음에 완전히 쏙 드는 사람은 신기루다.


그렇다면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선택뿐입니다.  


"어떤 종류의 불행과 행복을 택할 것인지 그것을 결정하는 문제뿐이었다.

나는 내게 없었던 것을 선택한 것이었다. 이전에도 없었고, 김장우와 결혼하면 앞으로도 없을 것이 분명한 그것, 그것을 나는 나영규에게서 구하기로 결심했다."

- 양귀자 장편소설 '모순'


이 문장처럼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선택뿐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멋진 기성복인 곱슬머리의 그와 함께하느냐, 안 하느냐, 두 가지 중 선택하는 일뿐입니다. 곱슬머리 그는 저의 감정을 따뜻하게 꽉 채워주지 않지만, 앞서 언급한 세 가지를 책임감 때문이라도 단단하게 지킬 사람이라고 지난 시간 동안 적어도 제 마음은 판단했습니다. 이 세 가지 중 하나라도 없을 때의 소름 끼치고 성가신 기분을 느껴봤기에 세 가지가 채워졌을 때 주는 안정감이 제게는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가 감정적으로 저를 완벽하게 채워주지 못하더라도, 이는 애초에 불가능할뿐더러 까짓것 마음이 시리고 외로운 날에는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읽고 명상하면서 대체재로 부족한 마음을 채우면 됩니다.


요즘 곱슬머리의 그가 일하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습니다. 일하는 사람은 갈수록 적어지고 해결책은 보이지 않고 일은 많은 삼중고를 겪고 있어요. 며칠 전 오늘은 저녁에 전화를 쉬어도 되겠냐고, 전화해도 오늘 힘들어서 짜증만 낼 것 같다는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저는 이토록 사소한 연락에서 곱슬머리 그의 상대에게 나쁜 감정을 떠넘기지 않으려는, 감정 따위는 없애버리려는 깔끔함을 느꼈습니다. 


지금까지 해온 연애에서는 상대가 감정을 참다가 커다란 눈덩이가 되어 갑작스레 저를 놀라게 하거나, 짜증이 묻은 그대로 전화하다가 애먼 저의 한마디에 상대의 짜증이 대폭발하는, 나쁜 감정이 전이되는 최악의 경험을 해봤거든요. 감기만큼이나 부정적인 감정은 쉽게 전이됩니다. 상대의 감정에 공감하고 일일이 반응해 주는 것도 좋지만 자신의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으려는 그의 성격이 이럴 때는 참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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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경 번역가: https://linktr.ee/linakim_8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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