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번역을 시작하는가? 답을 찾지 못해도 일단 이 질문을 자신에게 계속한다. 그리고 '나는 어떻게 번역을 시작할 것인가?'를 고민해 본다.
#1
'왜 인생을 살까?'라는 거창한 질문에 빠진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인생을 왜 사는지 진심으로 답을 찾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이런 질문에 푹 빠져 고민하는 내가 멋져 보이기도 했다.
통유리를 통해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카페에서 현 남자친구 미래 남편 대기자에게도 이 이야기를 했더랬다. 왜 인생을 사는지 계속 생각하고 있고 아직 답을 내리지 못했다는 말을. 멋진 듯이, 사색에 자주 잠겨 본 사람처럼 말하자 현 남자친구 미래 남편 대기자는 사주에 물이 가득한 사람답게 불같은 사색을 꺼뜨리는 답변을 내놓았다. 길게 답변해 줬는데 지금은 이 말만 기억이 난다.
"이미 태어난 건 어쩔 수 없어. 그렇다면 '왜' 사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살지를 고민해야지."
너무나 깔끔한 해답이어서 오히려 멋있는 사색이 깨지는 듯했지만 가장 현실적인 답안이었다. 실제로 나를 포함한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에 집중하곤 한다. 이를테면 나는 십 대 때는 어떻게 수학 문제집을 많이 풀 수 있나, 어떻게 친구와 화해할 수 있나, 이십 대 때는 어떻게 유학을 갈 수 있나, 어떻게 취업을 할 수 있나, 삼십 대 때는 결혼은 인생에서 어떻게 하는 것인가, 어떻게 번아웃에 빠지지 않는가, 이런 어떻게가 주를 이루는 고민을 해 왔다.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어떻게를 갈구했다.
그러나, 멋있는 사색처럼 느껴지더라도 '왜'가 먼저 와야 한다. 황농문 박사는 책 <몰입>에서 "'어떻게 하면 되는가?'라는 물음보다는 '왜 그렇게 되는가?' 하는 물음이 더 절실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라고 했다. '왜 번역을 하고 싶은가?'라고 자신에게 물어보자. 아주 자잘한 이유라도 괜찮다. 정확한 답을 내리지 못하더라도 괜찮다. 황석희 번역가는 책 <번역: 황석희>에서 그냥 어쩌다 보니 영화 번역가가 되었다고 밝혔다. 딱히 대단한 이유가 아니라도 괜찮으니 MBTI 극 T처럼 왜?를 자신에게 반복해서 써 보자. 물론 이 질문에 너무 함몰되지 않을 정도로만.
#2
자신에게 '왜?'라고 묻다 보면 진심으로 이 직종이 자신에게 맞는지 양심상이라도 솔직하게 생각하게 되어 있다.
과거를 떠올려 보면 사실 오래되어 대부분 가물가물하다. 가물가물하지만 신기하게도 번역과 관련해 선명하게 남아 있는 몇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일본어를 공부할 때 재미있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일본어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는가? 생각했다. 번역가가 있었다. 두 번째는 프리랜서 번역가가 혼자서 일할 수 있고 제약이 적어 자유롭다는 점이었다. 인간관계에 너무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대학생 때 이런 생각을 하다니 당시에도 사람과의 관계에서 다소 피로함을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다. 대학생을 지나 혼자서 몰두해서 하는 일을 좋아한다는 나의 기질은 변하지 않았다.
통상적으로 적용되는 프리랜서 번역가로서 도움이 되는 기질과 자질은 있다.
기반을 다질 때까지 포기하지 않는 인내력. 나는 타고난 인내력이 엄청난 사람은 아니다. 당시 퇴사를 하고 프리랜서 번역가의 길을 선택했기에 불안해서라도 꾸준히 열심히 해야 했다.
기반을 다진 후에도 필연적으로 따라다니는 불안을 견딜 수 있는지? 프리랜서는 자유와 불안을 맞바꾼 직종이다. 번역가를 처음 준비할 때 '존버'라는 말을 듣곤 했다. 불안 때문에 이탈하지 않고 버티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불안을 열심이라는 단어로 승화할 수 있는지? 앞에서 '존버'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고 했는데 여기에 SNS에서 우연히 본 단어인 '존열'을 추가하겠다. 열심히 할 각오가 되어 있는지 알아보아야 한다.
혼자서 일하고 싶은지?
밖에서 사람을 만나기보다는 무언가를 혼자 파고드는 것을 좋아하는지?
기반을 다질 때까지 시간적, 재정적 여유가 되는지?
이는 자신에게 '왜 번역이 하고 싶은가?'라고 묻다 보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질문들이다. 왜 번역을 하고 싶은가? > 혼자서 자유롭게 일하고 싶다 > 혼자 종일 있어도 미칠 정도로 힘들지 않은가? 이런 식의 흐름이다. 자신의 기질과 반대되면 이 질문들에 부정적인 대답이 나온다. 양심상이라도 자신의 솔직한 마음은 속이지 못한다. 자신의 기질에 맞는지, 자질이 있는지 솔직하게 생각해 보자.
#3
거창하게 말했지만 사실 나도 자신에게 각을 잡고 '왜'를 물어본 적은 없다. 본능적으로 이유를 알았달까. 예전에 직장을 다닐 때 사람과의 관계에 많이 지친 상태였다. 항상 새벽에 출근해야 하는 직장이어서 일찍 일어나 자동차를 끌고 출근하는 것도 퇴사를 고민할 정도로 힘들고 귀찮았다. 반면 혼자 일하는 번역가는 추운 날 아침에 나갈 필요가 없었다. 누군가에게는 사소할 수 있지만 내게는 이런 큰 이유들이 모여 오랜 시간 번역가를 꿈꾸게 했고, 이는 선택의 순간에 결정적인 요인이 되기도 했다. 위에서 언급한 혼자서 일하고 싶은지 등의 질문에는 항상 가능하다고 생각해 왔다.
소소한 이유라도 자신이 왜 번역가를 해야 하는지 묻는 것. 왜 위험하게 현재의 일이 아닌 번역가에 도전하려는 것인지 묻는 것. 물론 투잡으로 번역하는 사람도 봤지만 전업이든 투잡이든 버티고 열심히 해야 함은 똑같기에, 자신에게 '왜'를 묻고 동기를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오래 일할 수 있다. 우리는 오래 이 일을 하려고 시작하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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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경 번역가: https://linktr.ee/linakim_8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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