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실패한 적이 있다. 아니, 실패했다고 느낀 시기가 있었다. 한국에서 대학원에 진학했지만 곧 깊은 회의에 빠졌고, 학문적 열정보다는 정치적 줄서기와 위계질서 속에서 염증을 느꼈다. 공부보다는 경쟁이, 성장보다는 자리 싸움이 우선시되던 분위기에서 나는 점점 지쳐갔다. 그렇게 결국,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채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때의 나는 정말 초라했다. 마치 큰 낙오자가 된 기분이었다. 남들은 경력을 쌓고, 논문을 발표하고, 다음 스텝을 밟고 있을 때, 나는 ‘중도포기’라는 이름 아래 혼자 제자리걸음을 하는 느낌이었다. 무엇보다도 스스로에게 실망스러웠다.
‘나는 결국 아무것도 해내지 못한 사람이구나.’
그 생각이 매일을 짓눌렀다.그 실패는 단지 한 번의 좌절이 아니었다. 자존감 전체를 흔들어버리는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왔다. 무엇을 시작해도 “어차피 또 포기하게 될 거야”라는 말이 내 안에서 계속 되뇌어졌다. 그렇게 한동안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움직이지 않는 게 더 안전한 것처럼 느껴졌고,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는 아예 시작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침묵의 시간은 오래 가지 않았다. 살기 위해선 뭔가를 해야 했다. 단순한 이유였지만, 그 이유가 내게 다시 움직일 힘을 주었다. 나는 한국을 떠났고, 일본에 왔다. 명확한 목표도, 계획도 없이. 그렇게 시작된 일본 생활은 내가 가진 실패의 기억을 전혀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해주었다.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 특히 사회복지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많은 이들이 내게 보여준 삶의 방식은 단순히 ‘회복’이라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강인함이었다. 이혼 후 혼자 아이를 키우는 여성, 고령에 집도 없이 거리를 떠도는 남성, 가족의 부양을 위해 이국으로 건너온 이주노동자들. 그들의 삶은 내게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우리는 완벽하지 않아. 하지만 그래도 살아가고 있어."
그들을 보며 나는 묻기 시작했다. ‘실패란 정말 뭘까?’ 사회적 기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남들보다 늦었기 때문에? 중간에 멈췄기 때문에? 그렇다면,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 대부분은 어쩌면 실패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말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삶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멈췄지만 다시 걸었고, 무너졌지만 다시 일어섰고, 늦었지만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순간 나는 알게 되었다. 실패는 돌아가는 길이 아니라, 다른 길로 향하는 이정표일 수 있다는 것을. 실패는 방향의 수정이다. ‘이 길이 아니었구나’를 알려주는 친절한 알림이자, ‘다른 길도 있다’는 가능성의 제안이다.
사회복지사로서 현장에서 일하며 가장 자주 접하는 단어 중 하나가 바로 ‘회복’이다. 회복탄력성, 기능 회복, 자립 회복…. 복지의 목적이 회복이라는 이름으로 표현될 때, 나는 종종 생각한다. 회복은 꼭 이전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일 필요가 있을까? 오히려 새로운 상태로 나아가는 것, 전에 없던 삶의 방식으로 ‘살아내는 것’이 진짜 회복이 아닐까?
내가 실패라고 여겼던 그 시간들도 결국엔 나를 지금 여기로 이끌었다. 그 경험이 없었다면 나는 일본에 오지도 않았을 것이고, 사회복지라는 직업을 선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나 자신을 그렇게 깊이 들여다볼 일도 없었을 것이다.
지금 돌아보면, 실패는 나를 부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나를 다시 짓기 위해 찾아온 통과의례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이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물론 또 실패할 수 있다. 앞으로의 인생에서도, 이 직업 안에서도, 새로운 도전 속에서도.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실패를 낙인처럼 여기지는 않는다.
실패는 곧, 내가 살아있고, 도전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는 당신에게도 실패의 기억이 있을지 모른다. 혹은 지금 바로 실패하고 있는 중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당신은 지금 멈춘 게 아니라, 단지 다른 방향을 향해 걷고 있는 중입니다.”
실패는 어떤 결론이 아니다. 그저 한 장면일 뿐이다. 그 장면 위에, 우리는 다음 장면을 써 내려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