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lly of the valley

포착하지 않은 상은 흩어진다.

by 두부언니
drop 04



Topˏˋ roseˏ freesia

Midˋˏ magnoliaˏ lily of the valley

Baseˏˋ jasmine






비는 아직 그치지 않았다. 창을 때리던 빗소리는 멎은 듯 했지만, 하얀 옷소매로 창에 서린 김을 닦아 내니 마당의 웅덩이에 작은 물보라가 아직까지 바글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제 이른 오후부터 내리던 비였다. 덕분에 건조하던 이른 봄의 찬바람이 조금 누그러든 기세다. J가 창문을 열어젖히자 무릎까지 자란 잡초가 바람에 이리저리 눕는 소리가 조금 더 분명하게 들려왔다. 그것들이 이리저리 쓸리는 소리가 가랑비 내리는 소리와 견줄 만큼 바람이 제법 거세다.


J는 지난주부터 마당의 잡초를 베어 넘기기 시작했지만, 이제 절반 정도를 겨우 정리했을 뿐이었다. 베어진 잡초가 비를 만나, 물기를 머금은 풀잎 향이 바람을 타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저 멀리 산 등성 위로는 아래서부터 동이 터 오기 시작했다. 해가 비추자 가느다란 빗줄기가 조금 더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뿌옇고 물안개가 자욱한 날씨였다. 마당 너머 산을 마주한 언덕 위에는 큰 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오늘의 날씨는 그마저도 흐릿하게 보일 정도로 가시거리가 짧았다. J는 손바닥을 들어 눈 앞을 가려 보았다. 저 멀리 나무를 향하던 시선이 손바닥에 가로막히자, 선명해지는 손바닥과 대비되며 사위가 뭉그러졌다. 다시 손바닥을 내리고 바라본 나무는 조금 전보다 선명해진 듯 보였지만, 그래도 여전히 안갯속에 파묻힌 형상이었다.


그때, 정적을 깨고 복도의 마룻바닥이 삐걱이는 소리가 났다. 아마도 옆 방에서 잠을 자던 베스가 일어난 모양이었다. 슬리퍼를 불규칙하게 딛는 소리가 방 문 너머로 들려왔다. 평소 왼쪽 다리가 불편한 베스는 비가 오는 날이면 평소보다 유난한 관절통을 호소하곤 했다. 이제 곧 주전자에 물을 끓이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올 것이다. J는 그 요란한 소리가 들려오면 아래층으로 내려갈 요량으로 침대 머리맡과 책상 위, 문 앞의 낮은 협탁 위에 자리하고 있었던 화분들을 모아다가 창가로 가져갔다. 비가 내리는 동안 환기를 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바람이라도 쐬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직 목대가 가느다란 유칼립투스가 바람에 조금 휘청거리는 듯했지만 그런대로 견딜 만해 보였다.


동이 트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해가 구름에 가려 사위가 어둑했다. J는 턴테이블의 바늘을 들어 LP판 위로 옮겼다. 바람 소리만 들리던 방 안이 서서히 데워지고 있었다. 이제 아래 층으로 내려가 커피라도 내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창문을 닫기 위해 다시 창가로 다가간 J는 무심코 마당 너머에 있는 나무를 바라봤다. 방 안에서 내다보면 꼭대기가 겨우 보일 만큼의 거리에 있는 나무 아래로 하얀 실루엣이 움직였다.



포착하지 않은 상은 흩어진다. J는 캐시미어 숄을 두르고 계단을 내려갔다. 나이 든 베스가 등 뒤에서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한 채로 맨 발로 마당을 디뎠다. 발바닥에 축축하게 달라붙는 진흙과 풀 사이로 간간히 물 웅덩이를 건너기도 했다. 종아리를 훨씬 밑도는 기장의 하얀색 파자마 밑단이 빗물과 흙탕물에 얼룩졌다.


마당을 건너 나무 아래 도착한 J는 차오르는 숨을 끌어올려 내쉬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복숭아께를 스치는 키가 작은 하얀 꽃들이 작게 흔들리고 있었다. 바람은 방 안에서 내다보았을 때 보다 잦아들어있었고, 흩날리던 빗줄기는 어느새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J는 나무 아래 서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이따금 나뭇잎에 머물던 작은 빗방울들이 J의 뺨 위로 떨어져 양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먼발치에서 보았던 것과는 다르게 선명한 모양새의 나뭇잎이 빼곡히도 메워져 있었다. 가까이서 볼 때 보다 몇 발자국 떨어져 보아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어느 인상파 화가의 그림이 떠올랐다.


나뭇잎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햇살이 빼곡한 나뭇잎 사이사이를 비추었고, 그 덕에 무수한 잎들이 한 층 더 얇아 보였다. 내리쬐는 햇살의 양이 점차 많아짐에 따라 시간이 정오를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복숭아께에는 여전히 키 작은 하얀 꽃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Noteˏ
빗방울 / 풀잎 / 청량한 / 풀밭 / 은방울꽃

맑은 향 뒤에 숨어 있는 은방울꽃 향이 풀잎인 듯 장미인 듯 묘한 향수입니다. 귤향이 나는 듯하다가도 곧 본래 모습인 듯 한 그 향이 툭 하고 비어져 나오는데, 이번엔 프리지아인 것 같습니다. 사실 프리지아와 은방울꽃 향기를 구분하는 일이 쉽진 않지만 풀향과 꽃향이 어우러지는 가운데 순간순간 비어져 나오는 그 향의 색은 아마도 실키한 하얀색일 것 같습니다.


*이 글을 paffem의 'drop04. 은은한 빗방울에 여린 꽃망울이 톡'향수를 테마로 작성된 단편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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