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 혹은 바닐라
melt 01
Topˏˋ cardamonˏ coffee
Midˋˏ jasmineˏ fir
Baseˏˋ incenseˏ vanilaˏ laotian oud
그것은 찻잔에 찐득하게 늘러 붙어있었다. 밝은 미색을 띠는 그것은 원래 투명한 액체였던 것 같다. 설탕을 푼 물을 팔팔 끓여, 수증기가 다 날아간 뒤 남은 잔여물 같았다. 뜨거운 열기에 그을려 한껏 쫄아든 모양새다. 그녀는 이른 저녁에 설핏 잠이 들었다. 그리고 한밤중도 새벽도 아닌 애매한 시간에 깨어 버렸다.
거실 창가에 위치한 화병에는 흰 백합이 한 다발 담겨 있었다. 그리고 식탁에도 한 다발, 침실에도 두어 다발이 더 놓여 있었다. 찻잔에서 나는 향기인지 백합에서 나는 향기인지 모를 것이 코 끝을 맴돌았다. 어쩌면 잠에서 막 깨어났을 때 창틀에 피워 둔 향냄새 인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잠에서 깨자마자 머리맡에 향을 피웠다. 향이 타들어가며 피어 올리는 연기라도 바라보고 있으면, 다시 잠이 들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결될 불면이었으면 애당초 잠에서 깨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한여름의 밤공기는 뜨거웠다. 도무지 식을 줄 모르는 열기가 어둠을 타고 방안 곳곳에 머물렀다. 창틀에 걸쳐 둔 하얀색 인센스 스틱은 이제 겨우 1cm 정도 타들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스틱이 타들어가며 피어오른 연기는 벽을 타고 올라가더니, 이내 천장에 송글송글 액체가 되어 맺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작은 방울이 되어 식탁이며 바닥 위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천장에서 떨어지는 것과는 별개로, 그녀가 손에 쥐고 있는 찻잔에도 그것은 송글송글 맺히고 있었다.
지난 주말이었다. 그녀는 테라스가 있는 아시안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광장을 향해 걸어 나온 참이었다. 한 여름의 해는 길었고, 7시를 넘긴 시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해는 아직 하늘에 걸려있었다.
그렇게 혼자 광장을 산책하다가 그녀는 노신사가 끄는 수레를 만났다. 수레에는 나무로 된 상자가 몇 개 실려 있었고, 어떤 상자들은 흰색 면포로 덮여 있었다. 그리고 그 면포 위에 이국적인 향을 풍기는 각종 향료가 진열되어 있었다. 그중에는 인센스 스틱도 몇 가지 놓여 있었다.
그녀는 그중에서도 커다란 흰색 꽃이 그려진 바닐라향 인센스 스틱을 집어 들었다. 이미 집안 곳곳의 화병에 꽂아 두었던 백합 다발이 떠올라서였을까. 백합의 묵직한 향기가 어쩐지 바닐라향과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바닐라 꽃에서는 과연 바닐라 향이 날지 궁금해졌다.
그녀는 찻잔의 가장자리를 타고 내려와, 찻잔의 바닥에 느리게 고이는 미색의 액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액체의 농도가 짙어서인지, 마치 도톰한 꽃잎이 찻잔을 타고 내려오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이 어느 정도 찻잔에 고이자, 그녀는 액체 위로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볼 수 있었다. 어둑한 방안의 찻잔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핏기 없는 백합꽃 같았다. 이제 한 여름의 열기는 향기와 뒤섞여 방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고, 그녀는 잠깐의 어지럼증을 느꼈다. 바늘을 올리지 않은 턴테이블에선 음악이 흘러나오는 듯했다.
Noteˏ
몽환적인 / 달달한 / 인센스 / 바닐라 / 도톰한 꽃잎
솜사탕의 부드럽고 가벼운 달콤함을 생각했다가 크게 당황했습니다. 이태원의 골목을 걸을 때 진하게 났던 인세스향이 처음에 코를 때렸(정말 때렸다)기 때문입니다. 뒤이어 바닐라향이 슬며시 올라오는데, 인센스와 바닐라향이 이렇게 유사한 점이 많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향냄새가 이렇게 달콤할 수도 있다는 사실 또한 놀라웠습니다.
아주 진하고 무거운 솜사탕을 입안 가득 머금은 듯한 느낌이에요. 치아 사이사이에 달짝지근한 솜사탕이 녹아 붙은 듯한 아주 끈적끈적한 기분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단순한 단내가 아니라 인센스 향과 어우러진 향기가 묘하게 묵직한 캐릭터를 만들어냅니다.
아무튼 한 번 맡으면 잊기 힘든 향임엔 분명해요. 확실히 유원지에서 만날 수 있는 솜사탕은 아닌 것 같고, 턴테이블의 음악이 흐르는 빈 방에서 만날 수 있(다면)을 법한 솜사탕인 것 같습니다.
*이 글은 paffem의 'melt 01. 어른의 솜사탕'향수를 테마로 작성된 단편 소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