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쪽짜리 달

반 쪽짜리 달이라고 발 아래 비추지 못 할 일인가요.

by 두부언니


path 02



Topˏˋ pink pepperˏleatherˏgin

Midˋˏ rose

Baseˏˋ woody





자장가를 듣고 싶나요? 어느덧 해는 저만큼 기울어서 하늘이 온통 살구색이네요. 사실은 오후 나절부터 내내 이 자리에 앉아 있었어요. 지평선 너머로 해가 기울고, 구름에 그림자가 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일이 썩 흥미로웠거든요. 확실히 해가 넘어가기 시작하니까 바람이 더 차가워지는 것 같아요. 들이쉴 때 딸려오는 바람에 레몬 냄새가 실려오는 것 같아요. 해는 마지막 남은 빛으로 하늘을 제 색깔로 물들이고 있어요. 내내 파랗던 하늘이 이제는 온통 오렌지빛으로 물들었어요. 해는 가장 높이 떠 있을 때 보다, 저물기 직전에 하늘을 제 색깔로 물들이는군요. 그래서였나요. 당신이 사라질 무렵의 기억이 가장 선명했던 것은.



결국엔 프라이드의 문제인 것 같아요. 자존감이라는 단어는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폄하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단 말이죠. 음, 그렇다고 프라이드라는 단어가 적절한지는 모르겠네요. 이건 이것대로 깃털이 화려한 공작의 느낌이 들어서 조금 부담스러운 것 같단 말이에요. 두서가 엉망이라 미안해요. 아무튼 그런 말이 떠올랐어요. 일본의 어느 유명한 여배우(키키 키린)가 그런 말을 했다네요. '부디 세상만사를 재미있게 받아들이고 유쾌하게 사시길. 너무 노력하지도 너무 움츠러들지도 말고요'라고 말이에요.


우리가 있는 그대로 존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너무 노력하지도 너무 움츠러들지도 말고요. 사실 마지막으로 보았던 당신의 모습이 적잖이 지쳐 보였던 탓에 못내 걱정이 되었답니다. 이런 말이 도움이 될 리 만무하겠지만, 우리의 해는 아직 정오에 떠 있잖아요? 해는 저물기 직전에 하늘을 제 색깔로 물들일 테니, 우리의 해가 저물어가는 모습을 조금은 여유 있게 바라보는 건 어떨까요. 너무 움츠러들지 말고요.



해가 저무는 동안 반대편에서 달이 떠오르고 있었네요. 오늘의 달은 동그란 모양으로 차오를 생각은 없는 것 같아 보여요. 저 달은 사실 조금 이르다 싶은 낮부터 내내 비슷한 자리에 떠 있었어요. 가만히 살펴보니 반으로 자른 단무지를 닮았네요. 방 안이 서늘한 것 같아서 고개를 돌려 등 뒤를 돌아보았어요. 조명을 켜지 않은 방안이 캄캄하잖아요. 자리에서 일어서자 무릎에서 똑하는 소리가 났어요. 천장의 조명을 켜기엔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햇빛인지 달빛인지 모를 이 조명이 아쉬워, 침대 머리맡에 놓인 키가 큰 초에 불을 붙였어요. 방안이 천천히 오렌지빛으로 물들기 시작했어요. 마치 방안에도 작은 해가 뜬 것 같단 말이죠. 아, 시간을 보니 달이라고 해야 할 것 같군요.


이따금 창 밖의 골목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가 방 안을 울릴 만큼 고요한 저녁이에요. 당신이 아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집 앞의 골목에는 그 흔한 가로등 하나 없어요. 그런데 오늘 밤은 반 쪽짜리 달빛이 밝아, 발 아래 치이는 돌까지 훤히 보이네요. 길을 걷기에는 충분하다는 생각이에요. 반 쪽짜리 달이라고 발 아래 비추지 못 할 일인가요. 그래서일까요. 당신의 빈 자리가 벌써 희미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은. 우리의 해는 저물어가고 달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를 조망하겠죠. 방 안을 데우는 촛불의 온기가 코 끝을 맴돌고 있어요. 그렇게 키가 큰 초가 이제 다 타들어 가네요.


Noteˏ
저무는 해 / 어두운 방 / 흔들리는 촛불 냄새 / 고독 / 포근함 / 온기

처음 느껴지는 산뜻한 향이 해질녘의 시원한 바람을 연상케 합니다. 이어서 느껴지는 뭉근한 향이 어둠 속에서 은은하게 퍼지는 작은 불빛을 떠오르게 하고요. 어쩐지 시원한 저녁나절에 캄캄한 방 안에 앉아, 혼자서 휴식을 즐길 때 어울리는 향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창 밖으로 저무는 해를 바라보며, 어둠 속에서 흔들리는 촛불과 함께 저녁나절을 보내고 싶어요. 활기찬 하루를 시작하기에도 좋을 것 같지만, 지친 하루의 마지막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기에도 부족함이 없는 향기라고 생각합니다. 코 끝에 남는 온기와 향기가 상냥한 향이에요.


*이 글은 paffem의 'path02. 달 빛 가득 돌담길'향수를 테마로 작성된 단편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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