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 dust

마음이 방황할 때 손발을 녹이러 찾아갈 수 있도록

by 두부언니


path 05



Topˏˋ jasmineˏ orangeˏ bitter orange

Midˋˏ orange blossomˏ jasmineˏ ginger

Baseˏˋ honeyˏ vanilaˏ sandalwood





얇게 썬 레몬을 띄운 찻잔이 나왔다. 몇 년 사이에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린 벨은 금방이라도 넘칠 듯 보이는 찻잔을 아슬아슬하게 쟁반에 받쳐 든 채로 테이블 가까이 다가왔다. 구리색의 쟁반 위에는 짙은 남색의 다기와 샛노란 찻물이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look at the bright side" 잔뜩 가라앉아 있는 내게 벨이 말을 건넸다.


알겠지만, 말처럼 쉬운 것도 없다. 당장 다음 달 방세가 막막하여 가슴이 콱 막힌 듯했기 때문이다. 남들은 다 견뎌내는 일을 나만 해내지 못하여 낙오자가 되어버린 듯했다. 하지만, 다음 달 방세보다 내 혈관이 먼저 막혀버릴 것만 같았던 찰나에 권고사직이라니. 타이밍 참 기가 막히지. 어차피 그렇게 등 떠밀지 않아도 제 발로 나오려던 참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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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고가구에서 나는 냄새가 장마를 실감케 했다. 이따금 벨이 불쏘시개로 잔불을 뒤집기 위해 난로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가 일어섰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오래된 에이프런이 바닥을 쓸면 먼지가 일었다. 실내의 공기는 장마철 치고는 쾌적했다. 바닥에서 일어난 먼지가 난롯불 앞에서 금빛이 되어 흩어졌다. 숨을 크게 들이쉴수록 묵직하게 끼쳐오는 나무 냄새에는 은은한 머루 향이 묻어 있었다.


어쩌면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옷이 나에게 과연 맞는가에 대한 충분한 고민 없이, 그냥 이대로 안주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대로 굴러가고 있는 듯 보였기 때문에 바로 잡으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아니, 어쩌면 그런 노력을 기울일 기운조차 없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따뜻한 찻잔을 손에 쥐니, 묵직하던 머리가 조금은 가벼워지는 듯한 기분이 되었다.


위기는 대개 문제를 바로 잡을 수 있는 기회를 동반한다. 어쩌면 필요 불가결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곰곰이 돌이켜보면 신호는 사방에 있었다. 내가 이 일을 그만둬야 하는 이유를 굳이 열거하지 않아도, 킹스크로스 역의 첫 번째 승강장에서 마지막 승강장까지의 거리만큼은 될 것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사실상 종착지가 없었기 때문에 어느 시점에 열차에서 내려야 하는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넘치면 덜고 빼면 되지만, 차오르지도 않은 찻잔으로 마실 물의 농도를 조절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벨, 미안하지만 따뜻한 물을 한 컵만 가져다주겠어요? 차가 너무 진한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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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의 주름진 손이 머그잔에 끓인 물을 내어왔다. 그녀가 고개를 숙여 탁자 위에 물 잔을 내려놓자, 은은한 백단향이 주위로 번졌다. 그녀는 금방 자리를 뜨지 않고 내가 앉은 테이블 옆에 잠깐 서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물 잔에서 그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부드럽게 웃는 벨의 얼굴에 주름이 깊게 패였다. 그녀는 내게 또 한마디 건네고는 카운터로 돌아갔다.


"life is journey." 마음 같아선 종착역을 당겨다 바로 이다음 역에 갖다 붙이고 싶었다. 대체 얼마큼의 정거장을 더 지나쳐야 종착역에 다다른다는 말인가. 난로에서는 남은 불씨가 타들어가며 내는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작고 불규칙적으로 들려왔다. 작지만 아늑한 공간이었다.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기에 더할 나위 없는 장소였다. 가슴에 뜨거운 것 하나쯤은 품고 살자. 그래서 생각이 길을 잃을 때, 마음이 방황할 때 손발을 녹이러 찾아갈 수 있도록.



Noteˏ
고전적인 / 고풍스러운 / 백단향 / 무게감 있는

오렌지와 바닐라가 어우러져 상큼하면서도 우아한 향이 납니다. 중성적인 성격의 향인 것 같아요. 진저와 허니의 조합 때문인지 어딘가 모르게 앤틱한 느낌도 나네요.

향수를 처음 뿌리는 순간, 나무로 된 고가구가 많은 골동품점에 들어선 듯한 기분이었어요. 아마도 백단(샌달우드)의 은은한 향기 덕분인 것 같습니다. 자꾸자꾸 맡을수록 마음이 따뜻하게 어루만져지는 것 같아서 한동안 코를 박고 있게 되네요 ㅎㅎ


*이 글은 paffem의 'path 05. 우아한 코트'향수를 테마로 작성된 단편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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